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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따져보기] 홍성일 문화연대 미디어문화센터 운영위원

“영화는 사디즘적 또는 마조히즘적 망상들이 과장되게 발전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현실에서 그러한 에너지들이 자연스럽고 위험한 방식으로 성숙하는 것을 막아줄 수 있다. 그와 같은 대중적 정신이상의 에너지가 미리 앞질러, 그리고 유익한 방식으로 분출하는 형태들 가운데 하나가 집단적 웃음이다.”

발터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읽으며 밑줄을 그었다. 글이 나온 1930년대의 대중적 매체였던 영화를 대신해 오늘의 일상적 매체인 TV를 주어로 삼아 보았다. ‘사디즘적 또는 마조히즘적 망상’에서는 막장 드라마를 연상했다. ‘집단적 웃음’을 마주하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오늘의 예능프로그램의 홍수를 생각했다. 〈개그 콘서트〉가 주말 예능프로 최강자였다는 기사도 생각났다. 집단적 웃음을 제공하기 때문에 큰 인기를 얻고 있다는 생각이다.

▲ KBS 2TV <개그콘서트> ⓒ KBS
그렇다면 왜 우리는 오늘 이 시점에 집단적 웃음을 원할까. 혹시 ‘대중적 정신이상’이 차고 넘쳐서는 아닌가. 무언가 이 사회가 잘못되고 있다는 무력감이 팽배한 것은 아닌가. 더불어 웃음이 뒤쳐진 사회를 떠올렸다. 벤야민에 따르면 해학이 사라진 곳에 해악이 뒤따른다. 에너지는 활로를 찾지 못해 자연스럽고 위험한 방식으로 성숙할 것이다. 예능에 대한 폭발적 관심과 수요는 우리 사회 위기의 심화와 그에 따른 어두운 에너지의 팽창과 상관있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예능 프로그램을 단지 예능 프로그램만으로 보아 달라는 주문은 매우 조야한 발상임을 알게 된다. 집단적 웃음을 제공하는 일은 막대한 사회적 책임을 떠안는 일이다. 물리적 폭력과 충돌을 제어함으로써 이 사회에 유익한 기여를 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단지 웃음이 아니라, 적절한 웃음을 제공해야 한다. 가려운 곳을 긁어주고 온 몸이 반응할 수 있는 웃음으로 승화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막말이 난무하고 서로를 헐뜯어 웃음을 유발하는 것은 억지스럽다. 웃음에도 수준을 나눌 수 있다면 가장 저열한 웃음이 아닐까 한다.

수준 높은 웃음은 실제 사회의 모순과 소통하며 이를 집단적 유희의 대상으로 만들고 그 속에서 사회를 변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이다. 벤야민은 이를 혁명의 목표로까지 이야기했다. “한 아이가 물건을 잡는 법을 배우면 공을 잡듯이 달을 향해서도 손을 뻗는 것처럼, 인류는 신경감응 시도를 할 때 손에 잡히는 목표들만이 아니라 일단 유토피아적인 성격을 띤 목표들도 겨냥하게 된다.”

▲ 홍성일 문화연대 미디어문화센터 운영위원
민초들은 대개 사회가 위기에 처하면 제일 먼저 지도자를 탓했다. 해학의 대상은 언제나 지도자였다. 허나 신기하게도 위기에 빠져 있는 우리 사회는 지도자를 집단 웃음의 대상으로 삼는 데 인색하다. 노무현 대통령은 인수위 시절부터 노통장으로 〈개그 콘서트〉의 주된 소재가 되었고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 또한 지금까지도 개그의 소재가 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오늘의 MB가 예능의 금기가 되었다는 점은 그 자체로 우리 사회의 병리적 징후이다. 수요는 큰데, 공급은 적절치 못한 셈이다. 공급은 잦은데 엉뚱한 곳을 향하는 셈이다.

하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정권에 비판적인 이들이 잘리고 잡히고 불타는 현실에 어찌 개그맨들이 감히 그 분을 웃음의 소재로 삼을 수 있겠는가. 분명한 것은 그 와중에 어두운 에너지가 자연스럽고 위험한 방식으로 성숙해간다는 것이다. 해학이 사라져 뒤쳐진 웃음의 뒷맛이 영 개운치 않은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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