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정신 돋보였던 ‘이런 사랑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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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방송 다시보기(26)]

80년대 우리 방송은 86, 88을 입에 달고 살았다. 평소에도 그랬지만 명절만 되면 더 심했다. KBS 1TV는 86년 1월1일 아침 7시15분부터 낮 12시50분까지 자그마치 5시간35분 동안 <출발 86, 하나로 세계로 미래로 - 새 역사가 보인다. 아시안게임의 해가 밝았다. 영원한 전진>이란 요란한 제목의 특집을 내보냈다.

KBS 1TV는 낮 12시50분 10분짜리 뉴스를 내고는 다시 낮 1시부터 <86 아시안 게임의 해 신정 스포츠대축제>를 편성해 설 연휴 사흘동안 내리 3시간씩 농구와 씨름 등 스포츠중계로 때웠다. MBC는 설 연휴 사흘 동안 내리 아침 8시부터 <아시아는 하나로>라는 특집으로 86아시안 게임 홍보에 열을 올렸다.

▲ 고 조소혜 작가
쇼 프로그램들은 어땠는가. 85년 연말 송년 특집에서 질리도록 본 얼굴들이 86년 신년 특집 쇼에 다시 나왔다. 연말엔 요란한 의상을 잔뜩 걸쳤던 똑같은 가수들이 옷만 한복으로 바뀐 채였다. 나와서는 고장난 레코드처럼 같은 노래를 불렀다.

KBS는 2TV에 <웃음 실은 청백전>, MBC는 <신년 특집쇼 1986>으로 설날 저녁 7시30분부터 9시까지 맞붙여 시청률 경쟁을 벌였다. 둘 다 생방송이라면서 조용필, 이은하 등 몇몇 톱 스타들은 두 프로에서 같은 시간에 얼굴을 내밀어 시청자들을 우롱했다.

신정 연휴의 난리통에도 돋보이는 게 있었다. KBS가 1TV에서 준비한 연작드라마 <행복을 찾습니다> 4부작은 수작이었다. 특히 중견작가를 내세운 2, 3부 보다 1부 <당신의 모습>(김준일 작가)과 4부 <이런 사랑의 노래>(조소혜 작가)는 비교적 신인작가를 기용해 기존 드라마의 격을 뛰어넘었다.

<당신의 모습>은 어촌의 순박한 노총각과 여교사간의 만남과 사랑을 그렸다. 양귀자가 80년대 초 월간 <학생 중앙>에 연재했던 소설 ‘손 내밀고 손 잡기’ 같은 섬세함이 돋보였다. 젊은이들의 사랑 얘기라면 으례 대도시 상류층을 끼고 벌어지는 도식을 깨고 바닷가 마을을 배경으로 성실하고 소박하게 살아가는 진짜 사람이 나왔다. 남자 주인공은 미끈한 조각 미남 대신 탤런트 고 장학수가 나왔다. 장항선과 연극배우 출신의 김지숙 같은 연기파 배우들도 합세했다.

▲ 이정호 참세상 편집국장

86년 1월 5일 저녁에 방송된 4부 <이런 사랑의 노래>는 고 조소혜 작가의 섬세함과 깔끔함으로 만들었다. 젊은 시절 한 순간의 오해로 헤어졌던 두 연인(서인석, 이덕희)이 우연히 길에서 다시 만나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고 다시 결합하는 과정을 수채화처럼 그려냈던 이 작품은 데뷔 3년차인 신예작가 조소혜의 이름을 세상에 알렸다. 84년 드라마게임이란 혹독한 작가 실습을 거친 이 당찬 여성은 이후 <젊은이의 양지>(95년), <첫사랑>(96년), <종이학>(98년), <회전목마>(2003년) 등으로 스타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나는 시청률 65.8%를 기록한 <첫사랑>보다 작가의 실험정신이 요동치던 <이런 사랑의 노래>가 더 그립다.

암 투병 중이었던 조소혜 같은 발군의 작가조차 시청률을 신경 써야 하는 요즘의 방송 풍토에선 좋은 드라마 보기가 더 어려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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