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용과 충족論

|contsmark0|시간이 지나면서 대상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때가 있다. 신문방송학 개론 시간에 배웠던 ‘이용과 충족論’이 그 중의 하나이다.
|contsmark1|
|contsmark2|
|contsmark3|
|contsmark4|
|contsmark5|이 이론은 “수용자들이 미디어 산물을 소비하는 것은 개인의 특정한 욕구 충족을 위해 동기화 되어있다” 라고 보는 이론인데, 이 이론에 와서야 비로소 커뮤니케이션 연구가 생산자 중심에서 수용자 중심으로 바뀌었다고 평가될 정도로 수용자의 입장이 중요시되는 이론이다.
|contsmark6|
|contsmark7|
|contsmark8|
|contsmark9|
|contsmark10|80년대 대학시절 억압적 정권 밑에서 굴절될 대로 굴절된 우리 언론현실을 보면서 ‘한국언론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력도 없는 한가한 제국주의 미디어이론이다’라고만 이해했었는데 방송생활을 10년쯤하고 보니 방송과 시청자의 관계를 이보다 더 적절하게 설명해주는 틀도 없다.
|contsmark11|
|contsmark12|
|contsmark13|
|contsmark14|
|contsmark15|모든 시청자는 자신의 특정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tv를 본다. 학교공부에 지친 10대가 정서적 해방과 이완을 맛보고 싶어서일 수도 있고, 남들과의 대화재료가 필요해서일 수도 있고, 삶을 꾸려 가는데 모르면 손해볼 것 같은 정보를 얻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보다 고양된 자기정체성을 탐구하고 확인하는 즐거움을 경험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다. 모든 프로그램은 어떤 층위가 되었건 시청자의 특정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존재한다.
|contsmark16|이 얼마나 명쾌한가. 이 틀로 보니 내가 지금 담당하는 프로그램도 어떤 층위의 어떤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제작해야 할지 감이 잡히고, 새로운 프로그램을 기획할 때도 아이디어가 훨씬 구체화, 정교화되는 경향이 있다.
|contsmark17|
|contsmark18|
|contsmark19|
|contsmark20|
|contsmark21|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이 틀로 프로그램을 보고 생각하는 사고습관을 가지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주변을 둘러봐도 시장의 무게중심은 생산자에게서 소비자에게로 급속히 움직이고 있었다. 소비자의 욕구를 이해하지 못하는 기업이나 조직은 생존할 수 없는 세상이 되고 있었다. 공급자 중심의 논리에 갇혀 잔뜩 힘이 들어갔던 어깨의 근육을 풀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contsmark22|
|contsmark23|
|contsmark24|
|contsmark25|
|contsmark26|주변의 친지나 시청자단체의 방송에 대한 불만도 이 틀로 이해했다. “왜 그렇게 저질이냐”, “애들 난리치는 것 밖에 없다”, “볼만한 프로그램이 있어야지” 등등의 비판을 접할 때마다 한편으로는 ‘좋은 프로그램도 많은데 그런 건 안 보고서’ 하면서도 ‘우리 방송이 시청자들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하는구나’하고 반성했다.
|contsmark27|
|contsmark28|
|contsmark29|
|contsmark30|
|contsmark31|그런데 충족시켜 주지 못하는 욕구가 무엇인지 가만히 생각해보다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시청자들도 자신의 욕구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것이다. 그저 ‘선정적이다’, ‘저질이다’, ‘재미없다’, ‘공정하지 못하다’와 같은 지극히 일면적이거나 규범적 층위에서의 불만은 있으나 구체적인 미디어 콘텐츠 소비맥락에서 채워지길 바라는 다양한 욕망의 층위와 섬세한 결을 자신도 뭔지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contsmark32|
|contsmark33|
|contsmark34|
|contsmark35|
|contsmark36|다시 말해서 이용해서 충족하고자 하는 동기화된 욕구가 무엇인지 시청자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먹어보지도 못한 음식맛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용과 충족論’이 이미 주어진 현실을 전제한 기능주의적인 설명이론이기는 해도 변화의 전망을 제시하는 이론은 아니었다.
|contsmark37|
|contsmark38|
|contsmark39|
|contsmark40|
|contsmark41|문제는 콘텐츠 제작자였다. 즉 프로듀서가 먼저 수용자가 돼서 자신의 삶을 위로하고 보다 높은 차원으로 고양시키는 섬세하고 다양한 ‘충족의 욕구’, 다른 말로 하면 취향과 안목을 지니고 있어야 그것을 만족시키는 좋은 프로그램도 나오는 것이다.
|contsmark42|
|contsmark43|
|contsmark44|
|contsmark45|
|contsmark46|그런 면에서 프로듀서에 대한 다양한 정의 가운데 abc 방송의 프로듀서 paul rauch가 내렸던 “a producer must have good taste”는 촌철살인의 것이었다. 프로듀서들은 제작자이기에 앞서 좋은 수용자여야 한다. 그래야 프로그램이 건강해지고 방송이 도돌이표를 벗어나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될 것이다.
|contsmark47|
|contsmark48|
|contsmark49|
|contsmark50|
|contsmark51|2001년은 우리 프로듀서들이 서로 연대해서 함께 고민하며 좋은 취향과 안목을 갖기 위해 노력하는 한 해가 되길 소망해 본다. 섣부른 유혹에 빠지지 말고 시청자를 진정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함은 생존의 기본이다.
|contsmark52||contsmark53|
저작권자 © PD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