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PD의 눈]

  나이가 들어 ‘그리운 청춘’ 운운하는 글은 쓰지 않겠노라고 결심한 적이 있다. 그것이야말로 구질구질한 아저씨들이 하는 철없는 짓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신촌, 오랜만에 대학 동아리의 동기들을 만났다. 대학시절 우리는 동아리방에서 통기타를 두드리며 ‘사랑노래’, ‘벗이여 해방이 온다’ 같은 센티한 쟁가를 부르고 금요일마다 순번을 정해 시나 소설을 써 가지고 와서는 잘했네 못했네 합평회를 하고 술을 먹고 더러는 싸우고 더러는 울기도 했다. 내년에 중학교에 들어가는 아이를 둔 ‘여자애’들이 아이 키우는 이야기를 한다.

요즘 아이들은 누구나 영어를 잘해서 수학실력으로 판가름이 나며 따라서 중학교 때 ‘수학의 정석’을 떼야 한단다. 우리는 우리들 중 아무도 ‘수학의 정석’을 뗀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일찍 태어나길 잘했다며 웃었다. 우리는 여전히 ‘자본주의’니, ‘민주주의’니 ‘음음’정권이니 그런 이야기도 했다. 우리가 그것을 발음하는 순간, 세상의 모든 탐욕스러운 것, 천한 것, 부당한 것들이 한꺼번에 ‘자본주의’라는 자루에 쓸어 담겼다. 자본주의는 저쪽에, 우리는 이쪽에 있었고 그것을 성토하는 동안 묘한 쾌감이 마음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 즐거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것은 나였다. 동기들이 사용하는 대통령의 별칭에 대해 내가 불만을 표한 것이다. ‘그것이 누구든 외모를 빗대어 폄하하는 말로 그를 부르는 것은 좋지 않다.’ 뭐 그런 요지였다. 분위기가 싸해졌다. 좌중에 이런 사람도 있어야 술자리에 활기가 생긴다고 한 친구가 농담을 했다. 과연 ‘음음’정권을 성토하는 이야기들이 갑자기 나에게로 향해졌다. 적과 아군이 갈라지자 게임이 시작되었다. 동기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고 분노가 서려 있었다.

나도 되받아치기 시작했다. 우리는 무엇을 비판하는 순간, 그것이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잊는다.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순간, 자본주의가 우리 안에 있음을, ‘음음’정권을 비판하는 순간 ‘음음’이 내 안에 있음을 잊는다! 나는 제법 비장해졌다. 그래서 어쩌라고 비판하지 말고 반성이나 하자고? 말도 안 돼. 넌 옛날부터 그런 식으로 빠져나갔어… 등등. 논쟁을 하는 동안 시간이 흘렀고 ‘여자애’들이 집에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달라진 것이라면 아버지 때문이 아니라 아이들 때문이었다. 

친구들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갑자기 마음 한 켠이 헛헛해졌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마음의 매트릭스를 빠져나왔다. 그래. 모든 것이 그대로구나. 대학시절이나 지금이나. 내용물만 달라졌지, 마음의 구조는 그대로이다. 논쟁할 때에 나는 ‘내 생각이 더 훌륭하다’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것이야말로 스스로가 얼마나 저열한지를 증명한다.

▲ 최근영 〈KBS스페셜〉 PD

다른 사람의 에고를 비판하는 순간 나는 내 안에도 에고가 있음을 잊어버렸다. 구질구질한 아저씨가 되어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나눈 것이 고작 자신의 견해를 지키려는 안간힘이라니. 논쟁 따위는 하지 말았어야 했다. 아이 키우고 돈 버느라고 고생하는 친구들에게 술이나 대접하며 묵묵히 고충을 들어주고 격려해줄 만큼의 아량도 못 되다니. 청춘을 그리워할 겨를도 없이 마음이 쓸쓸해진다. 여전히 나 좀 봐 달라고 내가 더 잘 났다고 인정받고 싶은 저열한 에고의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나는 아직도 어른이 되지 못한 것이다.

저작권자 © PD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