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와 ‘오컴의 면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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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와 ‘오컴의 면도날’
[경계에서] 이성규 독립PD
  • 이성규 독립PD
  • 승인 2009.10.20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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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캘커타에서 인력거를 타는 것은 마음이 영 불편한 일이 된다. 인력거를 타고 안타는 것은 인력거꾼들의 생계와 맞닿아 있다. 하지만 마음은 꼭 그렇게 가지만 않는다. 사람이 끄는 것에 사람이 올라탄다는 것은 비인도적이란 생각 탓이다. 한 쪽에선 얄팍한 인도주의에 불과할 뿐이라며, 날선 목소리를 낸다.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면서도 인력거에 몸을 싣기가 쉽지 않다. 인력거 위에 오르면 고단하게 살아가는 인력거꾼과 인력거의 관절이 모두 느껴지게 된다. 그 관절위에 타고 있으려니, 인력거꾼의 인생이 마모돼가고 있는 것 같아 슬퍼진다. 그들의 삶이 가난하지만 행복하다고, 슬프다고 말하기 어렵다. 인력거꾼의 등 뒤에 깊게 패인 순종과 체념을 보면 그냥 눈물이 흐른다.” - <오래된 인력거>의 연출 일지 가운데

인도 인력거꾼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오래된 인력거>의 촬영을 위해 필자는 약 100일 동안 인도의 캘커타에서 지냈다. 롤랑 조페 감독의 영화 <시티 오브 조이>를 보면, 간호사 조안과 의사 맥스 사이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삶은 세 가지 방식이 있어. 도망치거나, 방관하거나, 부딪치거나.’ <오래된 인력거>엔 각각 세 가지 방식의 삶을 살아가는 인력거꾼 세 사람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늘 부지런하게 뛰어 다니는 55세의 샬림은 ‘부딪치는’, 그리고 외국인 여행자들에게 미소를 띠며 종을 파는 50세의 모하메드는 ‘방관하는’, 끝으로 비하르의 카스트 전쟁에서 아버지를 잃은 스무 살의 힌두 청년 마노즈는 ‘도망치는’ 캐릭터다.

스무 살의 인력거꾼 마노즈는 인도 비하르의 아르왈 출신의 천민으로 그가 10살 되던 해, 상층카스트 민병대의 만행에 의해 아버지를 잃었다. 총을 맞고 죽어가는 아버지를 본 것이다. 필자는 10년 전 소년이었던 마노즈의 얼굴을 기억한다. 마노즈의 얼굴은 표정 변화가 없는 마네킹 같은 모습이었다. 그냥 놔두면 석고상 같은 얼굴,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는 무표정. 그 소년이 캘커타로 나왔다는 이야길 듣고, 사람을 풀어 수소문을 한 끝에 스무 살이 된 마노즈를 만났다. 그는 필자를 기억하지 못했다.

촬영이 중반쯤 이르렀을 때, 마노즈가 기억의 입을 열었다. “당신을 기억해요. 어릴 때, 내게 과자 한 봉지를 줬던 이방인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당신이었군요.” 그의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상흔들을 조금씩 기억해내며 비하르의 학살을 이야기했다. 조심스러워진다. ‘인도인은 가난하지만 행복한 사람들’의 명제를 우리가 깨트리는 것은 아닐까. 그것도 리얼리즘이란 잔혹한 틀에 의해서 말이다.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이들은 참 나쁜 사람들이란 생각이 든다. 다른 이들의 속내를 속속들이 드러내려고 한다. 그냥 놔두면 ‘행복해요’란 말을 컨테이너 벨트 위의 상품처럼 반복할 사람들을 이리저리 헤집으니 말이다.

▲ 이성규 독립PD
<오래된 인력거>는 희망을 읽을 수 없는 인력거꾼의 비극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다. 영상은 간결하면서도 미스터리가 가득하고, 신비롭고 모호한 동시에 매우 명료하고 분명해야 한다. 그러다보니 오컴의 면도날은 촬영용 트리트먼트 곳곳을 잘라내곤 했다. 캘커타에서 촬영하며 필자가 머물던 방은 한화로 5천원인 허름한 곳이었다. 비가 오면 천정에서 비가 새곤 했다. 한 평도 안 되는 공간. 마치 도시빈민 수용소에 갇힌 기분이다. 물이 새는 밤이면, 천정에서 떨어지는 물을 받으며 밤을 샜다. 간간히 컴퓨터의 자판을 두들기면서 촬영을 위한 트리트먼트 작업을 했다. 복잡하고 기구한 인력거꾼의 사연을 단순화 시켰다.

오컴의 면도날은 종종 필자의 신념을 잘라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라내야 할 것은 너무도 많았다. 촬영용 트리트먼트엔 인도 몬순의 습기가 가득했다. 그래서일까. 촬영된 영상 속에도 몬순의 습기가 가득하다. 이젠 영상을 잘라내어 버려야 하는 후반작업을 앞두고 있다. 타인의 고통이 담긴 영상을 잘라내는 것은 인력거를 타느냐 안타느냐 하는 고민만큼 힘들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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