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민주주의인가, 정치 마케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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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독일=서명준 통신원

지난해 9월에 있었던 독일 연방총리후보 TV토론은 예상답게(?!) 아주 싱겁게 끝났다. 정치적 입장에서 뚜렷하게 대비되지 않는 메르켈 총리와 슈타인마이어 총리후보는 선거기간 내내 서로 비슷한 내용으로 일관했고, 결국 방송토론에서마저 대결을 회피하고 말았다. TV토론이 시작되고 몇 분이 지나지 않아 곧바로 지루함이 느껴졌다. 좌파당의 약진을 제외하면 9월 총선 자체가 독일 선거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논쟁이 없었던 한마디로 김빠진 선거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독일은 최근 들어 치열한 정치사회적 논쟁을 통해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야 할 여러 중대 사안들을 목전에 두고 있다. 예컨대 아프가니스탄 파병문제, 미래 사회시스템 논쟁을 불러일으킬 만큼 심각한 경제위기의 극복, 미래 에너지 개발문제, 교육과 의료보험 시스템 개선 등 해결해야할 사안들이 산적해있다. 막강한 사회민주주의 시스템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과 유럽 경제의 견인차라는 자만감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다. 하지만 메르켈과 슈타인마이어 후보는 이런 민감한 사안들을 적당히 피해가는 노련함(?)을 보였는데, 스핀닥터(spindoctor)와 베를린 주재 정치부 기자들의 지도편달에 충성하는 모습이었다. 미디어선거가 정치의식의 발달을 가로막았다는 평가가 가능한 대목이다.

정당 미디어전략가와 언론의 가르침은 이랬다. 국민들이 바라는 것은 화합과 평화이지 논쟁과 비판이 아니라는 것이다. 심각한 논쟁보다는 한때 히틀러 독재에 대항하던 ‘민주대연합’류의 기억을 되살려서 화합에 ‘올인’해야 한다는 지도편달의 말씀이다. 사정이 이러니 전통적으로 중도좌파 성향의 사민당과 보수우파 기민당의 양대 후보인 슈타인마이어와 메르켈은 미디어 앞에 선 부부나 연인처럼 다정해 보였다. <스타워즈>에서 스카이워커와 다스 베이더의 숙명적인 결투를 연상시키는 날선 비판과 정책대결이 오가는 멋진 한판 승부를 기대했던 유권자들에게 후보 TV토론회는 <우결(우리 결혼했어요>)을 방불케 할 정도였다. 양대 후보간 의견 차이는 올 여름 휴가 행선지가 바다인지 산인지를 놓고 티격태격하는 수준으로 전락했다.

여러 패널들의 질문에 슈타인마이어 후보가 다소 유리했던 것은 사실이다. 예컨대 최저임금제 등 사회복지정책의 경우, 슈타인마이어는 사민당 후보로서 당의 입장과 큰 마찰이 없다. 반면 메르켈 총리는 기민당이 친기업성향의 보수정당이어서 마음 편하게 복지확대를 주장할 수 없는 입장이다. 더구나 메르켈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전도사라는 이미지를 벗고 독일식 사회적 시장경제 시스템을 유지하겠다는, 보수파의 입장에서 보면 일종의 ‘변절’을 감행하고 있어서 당의 외면을 받을 수 있다. 총선 결과 메르켈 총리가 재선되었지만, TV토론에서 슈타인마이어의 화려한 언변이 돋보였고 메르켈이 실수만하지 않으려는 소극적 모습으로 일관했던 까닭이 여기에 있다.

정치인이 ‘미디어 트레이닝’에 쏟아 붇는 시간이 늘고 정치마케팅이 논쟁과 비판보다 힘을 얻고 있지만, 헬무트 콜(기민당)과 빌리 브란트(사민당) 전 총리들만 해도 가히 논쟁의 달인들이어서 이른바 ‘총리논쟁’이라는 조어가 생길 정도였다. 특히 브란트는 거짓을 말하는 상대후보에게 거침없이 호통치는 정치인으로 유명했고 그의 포효하는 모습은 역설적으로 유권자의 표심으로 이어졌다. 오늘 미디어선거의 시대가 정말 도래했다면, 권력쟁취에 관심 있는 정치인들은 오히려 이런 거침없는 비판에서 국민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 독일=서명준 통신원/독일 베를린자유대 언론학 박사과정
정치마케팅의 시대에 선거‘전(戰)’은 선거‘마케팅’으로 변해버렸다. 민주주의에서 치열한 정책결투가 결여된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하나의 마케팅시장을 창출했다는 화려한 분석들이 난무하고 있지만, 오늘날 선거 때마다 심화되고 있는 정치마케팅의 폐해가 얼마나 심각한지 연방총선 TV토론회가 하나의 사례를 보여준 셈이다. 정책대결을 회피하고 현란한 말잔치로 일관하려는 정치인들에게 권력을 맡겨도 될 것인가. 그들과 정말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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