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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클리핑] 김수현 작가 “내 드라마, 막장에 대한 반발”

13일 오전 10시 전남 순천 송광사 문수전을 나선 법정 스님의 법구가 대웅전 앞마당에서 멈췄다. 그가 평생 따르던 스승 부처님께 마지막 3배를 고하기 위해서였다. 조계종을 상징하는 조계산이 병풍처럼 둘러싼 대웅전 앞마당의 지형은 연화지(연꽃이 피는 연못)다. 탑을 세우면 아래로 가라앉는다고 해서 석물 하나 세우지 않았다. 그 연화지 안팎엔 법구를 마지막 배웅하려 새벽부터 몰려든 3만여명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수많은 스님들도 그의 법구를 에워쌌다.

<한겨레>는 “35년 전 그가 이곳에 왔을 땐 그의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당시 그는 서울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8명의 생목숨이 하루아침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독재자에 대한 증오심을 풀 길이 없어 그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곳에 내려왔다”고 전했다. 그의 주변엔 사복경찰 대여섯명이 그림자처럼 붙어다녔다.

기독교인들이 주도하던 민주화운동판에서 고군분투하다 내려오는 그에게 산중 노스님들은 “중이 중노릇이나 잘 할 것이지, 무슨 일을 잘못했기에 저렇게 세속 형사들이 산중까지 오느냐”면서 그를 경원했다. 불교계와 대중들의 대표적인 소통창구로 자리 잡은 템플스테이를 30년 전 그가 송광사에서 ‘선수련회’란 이름으로 시작할 당시만 해도 “기도나 시키면 될 세속인들을 무엇하러 산사 수련장에까지 출입시키느냐”는 사시 또한 적지 않았다.

▲ 3월 15일 한겨레 5면
세속인들이 ‘불교는 어려워서 접근할 길이 없다’며 한탄할 때 가장 쉬운 문체로 산중불교와 대중들을 소통시켰을 때도 주위엔 “중이 무슨 글이냐”는 핀잔이 팽배했다. 그는 ‘전통’으로 무장한 무관심, 무지와 싸우는 불교계의 이단아였고, 성장이라는 구호 아래 강요된 반인권을 용납할 수 없어 계란으로 바위를 치던 시대의 반항아였다. 세상 사람들이 욕망을 채우기 위해 도시로 향할 때 반대로 산속 오두막으로 숨어들었던 은자였다.

그의 법구 주위엔 큰스님이라면 으레 따르던 만장 하나, 연꽃 상여 하나 보이지 않았다. 역시 이단아였다. 그는 불교를 아파했고, 소유와 욕망의 시대를 아파했다. 그는 말년 폐암으로 고생했다. 석가모니 당시 최고의 법력을 자랑했던 유마거사가 몸져눕자 석가모니가 문수보살을 시켜 병문안을 한다. 문수보살이 “어찌 거사같은 분이 아플 수가 있느냐”고 묻자, 유마거사는 말한다.

조계산 언덕에 마련된 다비장에선 1만5천여명이 따라와 서로 사진을 찍겠다고 자리다툼을 하며 소란했다. 1980년대 조계산 천자암에서 불일암을 오가며 법정 스님이 헌남비에 끓여준 국수를 먹곤 했던 선승 법웅 스님은 다비장을 오르며 “법정 스님이 장례 때 아무것도 하지 말고 폐 끼치지 말고 그대로 태우라는 것은 허언이 아니라 평소 살던 삶 그대로를 말한 것”이라며 “그 깐깐한 성정에 여기까지 와서 부산을 떠는 사람들을 보면 다비장에서 벌떡 일어서지 않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장작불에 불이 붙었다. 법정 스님의 상좌인 길상사 주지 덕현 스님이 “화중생련(火中生蓮)”이라고 외쳤다. 유마거사는 “불꽃(욕망) 속에서도 연꽃을 피워내야, 마침내 시들지 않는다”고 했다. 법구에 불꽃이 휩싸이자 “스님, 스님 뜨거워요, 어서 나오세요”라는 보살(여성불자)들의 울부짖음이 메아리쳤지만 시대의 어둠 속으로 기꺼이 걸어간 이단아는 불꽃이 다 타들어갈 때까지 끝내 나오지 않았다.

송광사 쪽은 밤을 새워 꼬박 하루 동안 다비를 마친 뒤 14일 오전 습골(뼈를 수거하는 것) 의식을 치르고 그의 유골을 송광사 지장전으로 옮겼다. 법정 스님의 유골은 다음달 28일 송광사에서 열리는 49재에서 비공개로 산골이 진행될 예정이다.

“절판된다니 사놓자”…법정스님 책 ‘품귀’
입적뒤 판매량 5배로 껑충…인터넷 서점 거의 주문불능

법정 스님의 저서가 품귀현상을 보이고 있다.

법정 스님이 11일 입적하기 전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겠다.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 주기를 간곡히 부탁한다”는 말을 남긴 것으로 전해지면서, 절판을 우려한 독자들이 스님의 저서들을 앞다퉈 사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교보문고에서 법정스님 입적 뒤 저서 판매량이 하루 만에 5배 늘어났으며, 인터파크도서에서도 <무소유> <일기일회> <아름다운 마무리> 등 스님의 산문집과 법문집이 판매량 1∼3위를 나란히 차지했다.

법정스님의 법구가 다비된 송광사에서도 법정스님의 저서가 매진됐다. 송광사 경내에 있는 서점 불일서적은 신자들의 요청에 따라 <무소유> 등 법정스님의 대표작 100권을 주문해 이날 새벽부터 판매했으나 1시간 만에 모두 팔렸다.

대표작 <무소유>와 <홀로 사는 즐거움> <말과 침묵> <텅빈 충만> 등은 오프라인 서점뿐 아니라 예스24, 알라딘, 인터넷교보문고 등 대부분 인터넷 서점들에서도 ‘품절’, ‘절판’, ‘판매중지’로 안내되고 주문이 불가능하다.

인터파크도서 오경연 북마스터는 “법정스님의 유지로 현재 더 이상 관련도서의 출간 예정이 불투명함에 따라 갑자기 도서 주문이 몰리고 있는 상황”이라며 “앞으로 출판사로부터 소량씩 도서가 확보되는 대로 한정적으로 판매가 이루어질 예정”이라고 말했다.

1976년 첫 출간된 ‘무소유’는 330만 부 넘게 팔려나간 인기 도서이자 황금만능주의를 경계하고 검소하며 단순한 삶을 권하는 내용으로 스님의 상징이 된 대표작이다.

출판사들은 법정스님이 책 인세를 어려운 이웃을 돕는 데 쓰지 않았나 추측할 뿐, 스님이 직접 “내가 이런 좋은 일을 한다”는 말을 겉으로 내비친 적은 없다고 전했다.

범우사 김영석 실장은 “스님이 인세로 좋은 일을 하셨고 맑고 향기로운 일에 쓰셨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지, 구체적으로 어떤 좋은 일에 쓰신다는 건지 말씀하신 적은 없다”고 말했다.

스파이라 매도당한 분단 지식인의 수난일기
송두율 다큐멘터리 ‘경계도시2’

2003년 대한민국을 들었다 놓았던 송두율 사건의 백서가 나왔다. <경계도시 2>. 책이 아닌 여성감독 홍형숙씨의 다큐멘터리다. <한겨레>는 “상영시간 104분 내내 옛 상처를 헤집는 고통”이라며 “애초 3주면 될 촬영이 10개월로 늘어났고, 그것을 편집해 공개하기까지 다시 6년이 흘렀다”고 설명했다.

1944년생인 그는 1967년 서울대 철학과 졸업 뒤 독일에 유학해 1972년 위르겐 하버마스의 지도를 받아 철학박사 학위를 땄다. 1982년 교수 자격을 취득했고 1994년부터 베를린 훔볼트 대학 교수로 재직해 왔다. 60~70년대 유신 반대운동을 주도하며 재독 민주화 운동의 중심이 됐다. 내재적 북한 접근론은 통일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94년에는 김일성 주석 장례식에 참석한 바 있다. 현재 독일시민권자.

▲ 3월 15일 한겨레 22면
그럼 송두율 사건이란? 2003년 9월22일 37년 만에 입국해 2004년 8월5일 출국할 때까지 10개월 동안 벌어진 일련의 과정을 말한다. 국정원에 네 차례, 검찰에 아홉 차례 소환되는 조사를 거쳐 입국 한달 만에 구속됐다. 혐의는 국가보안법 위반. 이듬해 3월, 징역 15년 구형에 7년이 선고됐고 7월 항소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으로 풀려났다. 검찰의 두툼한 공소사실 가운데 1992년 5월부터 5차례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을 만난 것과 황장엽을 상대로 1억원 손해배상을 청구한 내용만 유죄로 인정했다.

이제 영화 얘기다. 카메라는 송두율의 입국부터 출국까지 동행한다. 정작 그를 국가보안법으로 재단한 국정원, 검찰, 법원 등 국가 기관에는 언감생심, 주변만 뱅뱅 돈다. 그게 영화의 핵심이자 아픔이다.

오두방정 호들갑 10개월, 그리고 까무룩한 침묵. 4년 뒤인 2008년 4월 대법원은 2심에서 유죄에 포함됐던 독일 국적 취득 뒤의 북한 방문에 대해서도 무죄를 선고했다. “2003년 그는 스파이였고, 2009년 그는 스파이가 아니다. 그때 그의 죄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한국 사회는 그때와 얼마나 다른가?” 영화는 그렇게 묻는다. 18일 개봉.

김수현 작가 “내 드라마, 막장에 대한 반발”

“최근 드라마는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의 악성 바이러스를 무분별하게 양성하고 있다.” 43년 경력의 한국 최고 드라마 작가 김수현(67)씨가 TV를 점령하고 있는 ‘막장 드라마’에 대해 작심하고 ‘쓴소리’를 했다.

김 작가는 1년6개월 만에 다시 선보이는 새 가족 드라마 SBS <인생은 아름다워>의 ‘기획의도’를 밝힌 글에서 “최근 드라마는 막장의 경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퇴폐와 불륜, 폭력을 위한 폭력, 오직 자극만이 목적인 갈등, 부정적인 냉소와 진실의 왜곡 등등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의 악성 바이러스를 무분별하게 양성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며 “현재 거의 대부분의 드라마가 출생의 비밀, 납득하기 어려운 삼각·사각관계, 극한을 모르는 복수의 향연, 비정상적 감정 표출, 전개상 편의를 위한 우연의 남발로 꼬이고 또 꼬이게 만드는 인간관계 등 온갖 막장 소재의 비빔밥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 작가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내 드라마가 점점 따뜻해지고 있는 것은 갈수록 '막장' 경쟁이 격화되고 있는 주변 상황에 대한 반발”이라고 말했다.

▲ 3월 15일 조선일보 A25면
<인생은 아름다워>는 제주도에서 펜션을 운영하는 노부부와 그 자식들이 일궈가는 크고 작은 일상을 담아낸다. 김 작가는 “그동안 대부분의 한국 드라마들 배경이 서울이었는데, 지방에서도 우리 국민이 나름의 인생을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다”며 “그런데 막상 촬영이 시작되고 난 뒤에는 날씨가 속을 썩여 걱정이 많다”고 했다.

‘김수현 사단’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는 과거 인연을 맺었던 배우를 계속 쓰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 베테랑 연기자들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하지만 가수 남규리가 중용된 건 다소 뜻밖. 김 작가는 “첫 주 독해에서는 조금 한심했는데 이번에 보니까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더라”며 웃었다. “혼내지는 않았어요. 그렇지 않아도 떨고 있을 텐데…. 그런데 이번에는 제대로 하더군요. 제 팀에는 늘 노련한 선배 연기자들이 후배들한테 따뜻한 선생님 역할을 하기 때문에 다행이죠. 이제 규리도 흐름을 잘 타고 있습니다.”

‘지붕뚫고 하이킥’ 암울한 결말?

“잘 가, 빵꾸똥꾸.”

MBC <지붕뚫고 하이킥>이 이번주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한겨레>는 “5회를 남겨놓은 상황에서 마지막회를 둘러싸고 온갖 설이 난무한다”면서 “지훈·정음 커플 완전 결별설, 준혁·세경의 커플 성립설 등은 착한 음모론에 속할 정도”라고 말했다.

특히 이순재 사장 와병설, 사위 정보석 사고설 등, 마니아들은 김병욱 PD의 전작들과 비교해가며 최종회의 암울함을 점친다. 김 PD는 전작들에서 실제로 시트콤의 결말이라고 말하기 무색할 정도로 이별과 죽음을 당연스럽게 연출해왔기 때문이다. 그러한 반전 또한 팬들이 ‘김병욱 표’ 시트콤에 열광하는 이유다.

하지만 이번 최종회는? 사실 기자들도 알 수 없다. 한동안은 7일 전 미리 공개되기도 했던 예고가 이번주에는 최종회까지 ‘보란듯이’ 중단됐다. 온갖 화제를 뿌렸던 프로그램의 종영인 만큼 언론 보도 또한 ‘설’을 근거해서 다수설, 소수설, 유력설 등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지난해 9월부터 시작된 6개월여의 여정 속에서 방송통신심의위의 ‘빵꾸똥꾸’ 제재, 황정음의 신종플루 확진 등의 악조건에 늘 굽히지 않고 정면 돌파해 온 김 PD가 결말에서는 어떤 판단을 내릴지 기대를 모은다.

물론 이미 분명해진 것도 많다. “빵꾸똥꾸”를 외치던 해리가 첫 방송보다 한 뼘쯤은 키가 자라 신애에게 마음 한편을 조심스럽게 여는 여유를 배웠으며, 신애도 해리의 무례함에 절교를 선언할 만큼 야물어졌다. 세경은 뒤늦은 사랑앓이로 한층 더 성숙해졌고, 정음 또한 손에 쥘 돈은 88만원이라는 현실의 벽 앞에서 고뇌하는 ‘청춘’이 됐다.

초우·비 내리는 호남선… 명곡 2700곡을 남기고 떠난 박춘석

1946년 어느날 앳된 얼굴의 피아노 연주자가 서울 명동의 미군 전용업소인 ‘황금 댄스홀’ 무대에 올랐다. 당시 경기중 4학년, 열여섯 살의 이 연주자는 짧은 머리를 감추기 위해 털모자를 눌러쓴 채 당대 최고의 연주자들로 꼽히던 엄토미(클라리넷), 최상용(트럼펫) 등과 화음을 맞췄다. 훗날 불세출의 작곡가로 대중에게 기억될 박춘석씨가 대중음악계에 데뷔하는 순간이었다.

<한국일보>는 “14일 세상을 떠난 박씨의 삶은 음악 그 자체였다”고 보도했다. 1930년 5월 8일 서울의 한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박씨의 본명은 의병(義秉). 예명 ‘춘석’은 어릴 적 집에서 부르던 이름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불리며 타고난 음악적 자질을 보였다. 네 살 때부터 풍금을 자유자재로 치기 시작했고 봉래소학교, 경기중을 거치면서 피아노와 아코디언 연주를 독학으로 터득했다.

그의 데뷔도 그런 재능을 눈여겨본 국내 재즈 피아니스트 1호 임근식씨에 의해 이뤄진 것이었다. 박씨는 이후 명동의 유명 주점 은성살롱과 미군부대에서 피아노 연주자로 활동했다. 1949년 서울대 음대 기악과에 피아노 전공으로 입학했으나 1년 만에 그만두고 신흥대(현 경희대) 영문과에 편입해 졸업했다.

박씨는 1954년 그의 첫사랑으로 알려진 가수 백일희가 부른 ‘황혼의 엘레지’를 발표하며 작곡가의 길로 본격적으로 들어섰고 이후 숱한 히트곡들을 쏟아냈다. ‘비 내리는 호남선’(손인호)와 ‘삼팔선의 봄’(최갑석), ‘아리랑 목동’(박단마) 등을 발표하며 금세 가요계의 스타 작곡가로 떠올랐다.

‘히트곡 제조기’로 알려지면서 그에게는 대형 가수들이 몰려들었다. 패티김, 이미자, 남진, 나훈아, 문주란, 정훈희 등이 그에게서 곡을 받았다. ‘가슴 아프게’ ‘마음이 고와야지’(남진), ‘초우’ ‘가을을 남기고 떠난 사람’(패티김), ‘물레방아 도는데’(나훈아), ‘마포종점’(은방울 자매) 등 박씨가 만든 주옥 같은 가요는 대중의 가슴을 적셨다.

그와 이미자의 만남은 특히나 대중에게 큰 울림을 전했다. 트로트 명곡 ‘섬마을 선생님’과 ‘기러기 아빠’ ‘흑산도 아가씨’ ‘삼백리 한려수도’ 등 500여 곡을 합작한 두 사람은 환상의 콤비로 시대를 풍미했다.

▲ 3월 15일 한국일보 37면
양적으로도 박씨는 가요계에 큰 족적을 남겼다. 1967년 3월 서울 시민회관에서 ‘박춘석 가요창작 999곡째 발표’라는 이색적인 공연을, 1970년대에는 국도극장에서 ‘박춘석 창작가요 2,000곡 기념 공연’을 가질 정도였다. 박씨가 남긴 곡은 2,700여 곡으로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는 1,152곡이 등록돼 있다. 모두 개인 최다 기록이다. 박씨는 이런 업적으로 2001년 음악계의 브리태니커로 불리는 영국 그로브음악대사전에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박씨는 1994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날개를 접어야 했다. 거동은 물론 언어장애까지 겹쳐 이후 16년 동안 칩거하며 투병했다. 생전 “나는 음악과 결혼했다”는 말을 곧잘 한 고인은 독신으로 삶을 마쳤다. KBS 경음악단장, 음악저작권협회 회장, 거성레코드사 회장 등을 지냈으며 KBS 방송가요대상, 제1회 대한민국연예예술상(1994), 옥관문화훈장(1995) 등을 받았다. 지난해에는 그의 음악적 업적을 기리는 박춘석기념사업회 추진위원회가 발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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