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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에서] 노홍석 독립PD

종종 편집실에서 후배 PD들이 편집하는 모습을 살짝 훔쳐보다보면 ‘우리 사는 세상엔 내가 접해보지 못한 신기하고도 재미난 일들이 많이도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별의별 희한하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들이 펼쳐지는 TV속 세상, 그러나 그 안엔 ‘쉬쉬’하며 숨겨온 빤한 거짓들이 난무하고 있다.

어쩌면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우리 스스로도 ‘방송을 100% 믿을 수는 없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지는 않나? 방송에서 보여지는 이야기가 어느새 ‘완전한 진실’이 아니게 된 것이다. 프로그램 내용의 진실성과 신빙성에 자꾸 의문을 가지게 되는 상황을 제공한 것은 제작진 모두의 책임이다. 치열한 시청률 경쟁, 늘 새롭고 재미있는 것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스트레스와 강박관념에 아무리 시달린다 해도, 그것은 진실에 눈 감은 의도된 연출에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한겨울 스키장 슬로프를 분주히 뛰어다니는 하얀 유니폼을 입은 요리사. 그의 손에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노란색 양은 냄비가 들려있다. “라면 시키신 분?” 멀리서 한 사람이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번쩍 든다. 맛있게 한 젓가락을 먹고 스키장 슬로프에서 먹는 라면 맛이 끝내준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와! 재미있네. 여기가 어디야? 진짜로 배달도 해줘?” 대답은 N0!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프로그램을 시청한 누군가가 방송 내용만 믿고 그 스키장에 가서 라면을 주문하려 한다. “여기 슬로프에서 라면 먹으려면 어디다가 주문해야 하나요?” 한다면 아마도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받게 될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낯이 후끈거려 얼른 편집실을 나왔다.

시청자들은 색다르고 재밌는 것을 원하고, 방송사는 시청률을 원한다. 한번 방송이 된 곳은 방송사를 바꿔가며 또 방송을 탄다. 거기까지는 좋은데 내용은 그때마다 조금씩 업그레이드가 된다. 지난 방송에서 보지 못했던 “Something New”가 가미된다. 방송사 담당 프로듀서의 마음을 꿰뚫고 있는 작가는 상상력을 발휘하고, 점점 더 어려워지는 제작 환경에서 PD의 연출력은 빛을 발한다. 담당 프로듀서는 만족해하고, 다음 주에는 더 센 것이 나 올 것이라는 믿음으로 제작진을 격려한다.

며칠 전 경상남도 남해에 전통장 담그는 모습을 촬영하기 위해 취재를 다녀왔다. 고즈넉한 마을의 전통 가옥과 오랜 세월과 경험이 빚어낸 수 백 개의 독이 있는 장독대 풍경을 상상했던 나는 현장을 보자 실망했다. 눈에 들어온 것은 개량된 집과 작업실 그리고 갓 중년에 접어든 신식 아주머니였다. 우리 프로그램이 의도하는 방향을 설명하자 아주머니는 바로 이해를 했고 촬영이 잘 진행 될 수 있도록 장소와 여건을 맞춰 보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간 많은 촬영을 했는데 왜 매번 똑같이 오래된 옛날 방식만을 고집해서 촬영하고 시청자들에게 보여 주는지 모르겠어요.”

예상치 못했던 얘기였다. “전통을 지키고 옛날 방식을 고수하는 것도 좋지만 시청하는 젊은 주부들에게 전통방식으로 장 담그기는 너무도 어려운 일입니다. 매번 전통방식만을 보여주어서는 당장 몇 년 후엔 전통방식 그대로 장을 담그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국민 모두가 공장에서 만드는 장만을 먹어야 할지도 모르죠.” 난 촬영을 강행하지 않았다. 다른 프로그램에서 보여줬던 그대로의 모습을 또 한 번 재현해 낸다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것이 직무유기였을 지라도 PD로서의 판단은 그것이 최선이었으니까.

▲ 노홍석 독립PD
아이템을 선정하고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일은 PD를 비롯한 제작진의 몫. 그리고 그 프로그램이 전파를 타고 시청자들에게 전달되게 하는 일은 방송사의 역할이다. 좋은 방송은 제작진과 방송사의 신뢰가 두터워야 한다. 인기와 시청률에 연연해서는 진실이 왜곡될 우려가 크다. 프로그램 내용의 진위여부가 판단되지 않은 상황에서 오타와 간접광고, 상표 가리기에만 연연하는 심의 관행 역시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프로그램의 진정성을 고민하는 PD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고민은 절대 뒷전이 되어선 안 된다. 순간 지나가는 몇 분 몇 초의 방송이라도, 사회적 영향력이 있고, 그만큼 막중한 책임이 수반되어야 하는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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