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 세계 제대로 짚은 정통산악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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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쟁이 PD가 보는 드라마 「산」

MBC-TV의 「산」이란 드라마가 있다. 모처럼 보는 ‘건강한’ 드라마인데다 제작비도 많이 들고 촬영에 많은 공을 들였다고 해서 방송 전부터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막상 방송을 시작하고 보니 시청자들의 반응이 시원치 않은 모양이다. 그래서, 어느 단체에서는 ‘오랫만에 보는 건강한 드라마’로 상을 주는 반면, 한쪽에서는 ‘작품성은 있는데 재미가 없다’는 비평을 가하기도 한다. 필자는 산에서 인생의 많은 것을 얻은 20년 경력의 산악인으로서 드라마 「산」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등산인구가 많은 만큼 시청률이 상당할 것이라는 필자의 예상과는 달리, 「산」은 10%정도의 시청률에 머물렀다. 편당 1억원 이상의 제작비를 들였다는 작품 치고는 시청률면에서 밑지는 장사를 한 셈이다. MBC가 예전에 제작·방영했던 대작드라마 「까레이스끼」의 경우와 비슷하다. 돈을 들인 만큼 확실한 성공을 거둔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이하 「여명…」)나 돈을 별로 들이지 않고도 화젯거리가 되고 있는 KBS 드라마 「용의 눈물」(이하 「용의…」) 등과 대비되는 점이다. 소재의 선택이라는 면에서 「산」과 「까레이스끼」가 「여명…」이나 「용의…」와 다른 점은, 이들이 특수한 분야 또는 소수집단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여명…」이나 「용의…」가 모두가 잘 알고 있는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반면, 「까레이스끼」는 잘 알려지지 않은 중앙아시아 한인유민사를, 「산」 역시 한국 산악운동사와 대학산악부라는 소수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게다가, 김성종 원작의 「여명…」은 드라마의 배경인 한국현대사 자체보다는 주인공 남녀의 얽히고 설킨 갈등관계를 주로 다룸으로써 이미 소설로서도 대중적 인기를 얻은 반면, 「산」과 「까레이스끼」는 원작이 없거나, 있더라도 대중적 인기와는 거리가 먼 것들이었다. 결국은 소재 선택에서 대중성이 떨어졌다는 것이 「산」의 시청률이 낮은 가장 큰 원인이라는 말이 된다. 드라마 「산」과 대응편성된 다른 채널의 프로그램들이 작품성 면에서 그리 대단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음에도 「산」의 시청률이 낮았다는 것은 시청자들은 주로 통속성에 따라 드라마를 선택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하지만, 드라마를 평가하는 데에는 통속성이 아닌 작품성이라는 근본적인 잣대가 존재한다. 시청률이 모든 것을 결정해버리는 요즘 세월에 드라마의 작품성을 논한다는 것이 시대착오인지는 모르겠으되, 작품성이란 분명 드라마 작가나 연출자들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기준이다. 비평가들마저 대중들과 똑같은 기준으로 작품을 바라보아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필자는 드라마 「산」의 작품성을 높이 평가한다. 내 나름의 이유는 이렇다. 먼저, 「산」은 드라마 주제곡에도 나오듯이, ‘나는 왜 사는 걸까?’ 하는 인생의 근본적인 의미를 찾는 사람들의 생각을 진지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혼자 산에 올라 인생의 의미를 생각해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가슴이 뭉클해지지 않을 수 없는 장면들이 드라마 「산」의 곳곳에 등장한다. 특히 드라마 후반부로 가면서, 현대사의 와중에서 고뇌하는 젊은이들이 산을 오르면서 보여주는 모험과 방황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에게 진한 감동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산이라는 자연적 소재와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등산행위에 대한 진지한 해석이, 이 드라마를 요즘에 흔한 소재주의 드라마나 트렌디 드라마가 아닌 수작(秀作)의 반열에 올려 놓고 있다.「산」은 소재를 선택하고 주제를 형상화시키는 방식에 있어서도 과감히 정공법을 택하고 있다. 드라마 「산」이 선택한 시공적 배경은 우리 나라의 산악운동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제대로 짚었다’고 공감하게 되는 부분이다. 국내 산악운동의 요람이라고 할 수 있는 도봉산이 그렇고, 수많은 산악인들의 혼이 잠든 설악산이 그러하며, 더 높은 곳으로 향하는 관문으로서의 알프스, 그리고 산악인들의 최종 목적지이자 반환점이기도 한 히말라야가 그러하다. 도봉산에서 알프스를 거쳐 히말라야로, 그리고 다시 도봉산으로 이어지는 심신의 행로는 한국의 유수한 산악인들이 걸었고 또 걷고자 했던 길 그대로다. 「산」은 한국의 산악운동사를 제대로 다룬 ‘정통 산악드라마’로서의 조건을 갖추었다는 말이다. 촬영단계에서도 「산」은 결코 꾀를 부리지 않았다. 막대한 돈과 시간을 들여가면서 될 수 있으면 실제 현장에서 찍으려 노력한 결과는 장대하고도 역동적인 화면으로 나타난다. 산을 오르내리는 연기자들의 동작과 자세도 진짜 산악인들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로 훌륭하며, 등반과정에서 일어나는 각종 사고장면 등도 비현실적이거나 어설픈 대목이 없다. 우리나라에서도 흥행에 성공한 산악영화 ‘클리프행어’가 말도 안되는 등반동작이나 사고장면을 연출하던 것에 비하면 「산」은 거의 흠잡을 데가 없을 정도다. 간혹 시대에 맞지 않는 호화로운 등산장비를 사용하는 것이 눈에 거슬리는 것을 제외하면, 등반 장면에 관한 한 「산」은 드라마의 중요한 평가기준인 리얼리티의 측면에서 다른 스포츠드라마가 일찍이 오르지 못한 수준에 도달했다. 등산에 취미가 없는 사람들은 흔히 “도로 내려올 걸 뭐하러 힘들게 올라가나?”라고 묻는다. 이럴 때마다 산악인들은 그저 ‘산이 좋아서 오른다’거나 ‘산이 거기 있기에 오른다’는 싱거운 대답을 하곤 한다. 대답 대신 ‘그럼 어차피 죽을 걸 왜 삽니까?’라고 되묻는 산쟁이도 더러 있다. 어쨌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산에 오르고, 그들의 마음속에서 질문은 계속된다. 나는 왜 사는 걸까? 나는 왜 산에 오르는 것일까? 세계의 수많은 산악소설, 수필, 전기, 그리고 많은 산악사진과 산악영화들이 그러하듯, 드라마 「산」은 이러한 의문에 진지하게 답하고자 애쓴 훌륭한 작품이다.※ 추기 : 이 원고를 쓰고 난 뒤, 「산」 촬영 도중에 탤런트 홍리나 씨가 절벽에서 떨어져 심하게 다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정확한 경위는 모르지만 충분히 방지할 수 있는 사고였다고 생각돼 가슴아프다. 그렇지 않아도 시청률과 제작비 때문에 궁지에 몰리고 있을 제작진이 더 어려워질 것 같아 정말 안타깝다. 홍리나씨의 쾌유를 빌며, 제작진이 남은 부분이라도 당황하지 말고 잘 마무리해 주기를 기대한다. 한편, 결과만 가지고 제작진을 윽박지르는 편성책임자나 관리책임자가 없기를 간곡히 바란다. 열심히 하려다 실패하는 경우, 벌을 주려고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격려를 해주는 것이 사려깊은 관리방식이라 생각한다. 무사안일주의보다는 실패를 동반할 수도 있는 도전정신이 백배 낫기 때문이다. 게다가 「산」은 결코 실패한 드라마가 아니다.최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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