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회 PD상 수상자 중국· 백두산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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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회 PD상 수상자 중국· 백두산 여행기
꾸밈없는 사람들과 함께한 반가운 여정
홍콩을 돌려받은 중국, 배고픔이 묻어나는 북녁땅, 우리 것을 지키는 조선족
그 가운데 솟아있는 백두산에서 오늘을 보다
  • 승인 1997.07.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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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0|이광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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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2|들꽃들이 군데군데 피어있는 산 능선 풀밭에 드러누웠다.산 아래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순간 바람에 내 살이 흩어지는가 했더니 바람에 실려온 물기를 머금고 풀 사이로 스며들었다. 그 위로 곧 풀들이 자라났다.
|contsmark3|백두산 천지를 오른 날 밤 꿈을 꿨다.그렇게 산을 내려오기가 싫더니 결국은 꿈속에서 산이 돼버렸나보다.
|contsmark4|어디로 좀 떠났으면…떠나야지…떠난다면 돌아오지 않을 먼길을 떠나야지…
|contsmark5|좁은 동굴 속에 몸이 낀 것 같은 답답함을 느끼며 ‘떠나야지’라는 말을 혼자 되뇌던 터에 운 좋게도 연합회에서 마련한 고구려유적지 답사와 백두산 등정에 참여하게 됐다. 88년인가 구보타라는 일본사진작가의 백두산 사진전을 본 이후 늘 가슴 한켠에 품어왔던 풍경이라 아주 반가운 여정이었지만 이번 여행은 출발부터 그리 즐거운 떠남은 아니었다. 우선 매일 북한 식량난 소식을 접하면서 동포가 굶주리는 북녘땅 가까이로 여행을 간다는 것 자체가 못내 꺼림칙했고 빠듯한 인원으로 우리의 공백을 메우느라 고생할 선배, 동료들에게 죄송스런 마음이 앞섰다. 밤늦게 서울역에서 마음가는 대로, 주머니 사정대로 열차를 타던 시절에 비하면 떠남이 얼마나 무거워진 건지.
|contsmark6|香港明天更美好(홍콩의 내일은 오늘보다 좋을 것이다)
|contsmark7|북경에 도착하니 제일 먼저 거리 곳곳에 나붙은 현수막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베이징에 도착한 날이 홍콩 반환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국외자의 눈으로 볼 때 중국과 홍콩의 재회는 마치 부잣집에 입양됐던 아이가 가난한 부모를 다시 만나는 것처럼 어딘가 어색한 것이었지만 중국인들의 기쁨과 자부심은 대단한 듯했다. 비록 6월 30일 밤 천안문광장의 불꽃놀이를 제대로 보진 못했지만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의 얼굴에서 식민지와 사회주의혁명의 한 세기를 보내고 이제 세계무대에 출정하는 중국인들의 희망찬 결의를 볼 수 있었다. 그들에게 홍콩은 중국을 세계시장의 격랑 속에서 풍요와 번영으로 이끌 힘좋은 예인선이리라.
|contsmark8|중국은 큰 나라다. 땅덩어리가 크다보니 사람도 많고 사람이 많으니 다스리는 일도 쉽진 않았을 게다. 그래서 지배자의 권력이 그렇게 컸나보다. ‘백성들이 얼마나 많은 피땀을 흘렸을까’만리장성에 도착했을 때 맨 먼저 이런 생각이 들었다. 기병들의 공격을 막기 위해 높은 산 능선에 꼭 저런 성을 쌓아야했을까.농민들의 분노가 오죽했으면 강제노역에 동원됐던 유방이 체제에 불만을 품고 군사를 일으켰을까. 만리장성과 자금성, 이화원을 둘러보며 우선 그 규모에 압도당하면서도 한편으론 대규모 공사에 동원됐을 사람들이 불쌍하게 여겨졌다.우리네 조상들은 그래도 행복했을 거라는 공상과 함께. 북경에서 이틀밤을 보내고 사흘째 되던 날 영화에서나 보던 침대기차를 탔다. 고구려 유적지를 둘러보기 위해 길림성 통화시까지 16시간을 가야한단다.동쪽으로 얼마나 달렸을까 차창 밖으로 눈에 익은 풍경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조금은 척박해 보이는 밭들 대신에 벼가 제법 자란 논이 나선다. 간간이 개구리소리도 들린다. 농사지을 땅을 찾아 두만강을 건넜던 조상들의 손길이 느껴지는 듯하다.술 마시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어영부영하는 사이 새벽 3시 반이나 됐을까 벌써 창밖이 환하게 밝았다. 통화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고구려의 도읍이었던 집안으로 향했다. 산길을 돌아 집안시가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건너편에 벌거벗은 산들이 눈에 들어온다. 높이 솟은 굴뚝과 벌거벗은 산이 스산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그 곳이 북녘땅이란다.
|contsmark9|경사가 60도가 넘을 것 같은 압록강변 언덕에도 어김없이 옥수수를 심어놓았다. 그 언덕 밭에 위태롭게 서서 김을 매는 한 아주머니의 뒷모습에서 배고픔이 묻어나는 듯 했다. 배에서 불과 6, 7m나 떨어졌을까. 내려서 호미 들고 돕고 싶지만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contsmark10|그다지 넓지 않은 강을 사이에 둔 양쪽 마을은 그저 윗동네 아랫동네일 뿐이다. 국경이라고 해서 철책이 있는 것도 아니요 양쪽엔 모두 한민족이 살고 있다. 두 마을을 그나마 구별할 수 있는 건 한쪽엔 산에 나무가 많고 건너편 마을엔 산에 나무가 없다는 정돈데…. 그 좁은 강이 중국과 북한을 가르고 요즘엔 생사를 가를 수도 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질 않았다.
|contsmark11|국경이 있든 말든 두 마을 사람들은 서로 돕고 산다고 했다.과거 중국이 문화혁명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기아를 겪을 땐 먹을 것을 찾아 북한으로 넘어가는 사람들도 많았단다. 당시엔 중국 청년들이 집안을 북한으로 착각하고 이젠 살았다고 기뻐하다 당국에 붙잡히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국경을 마주한 두 마을에서 느낀 서글픔은 집안시의 고구려유적을 보면 더욱 커진다.일제때 도굴 당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고분들은 머리를 풀어헤친 채 여기저기 방치돼 있고 국내성과 환도산성은 이젠 흔적만 아스라히 남아있을 뿐이다.옛 영광의 잔해는 워낙 서글픈 법이지만 쇠락한 듯 보이는 그곳에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는 것이 있었다. 우리말과 글을 지키는 조선족들의 자긍심과 낯선 우리일행을 따뜻하게 맞아준 한 조선족 할머니의 동포애에서 우리 일행은 모두 온갖 세파에도 마모되지 않는 민족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그것이 눈에 보이는 그 어떤 유적이나 유물보다 더 소중한 자산이 아닐지.
|contsmark12|하루 서너 시간밖에 자지못하고 강행군을 하다보니 모두들 피로가 쌓여 천지에 오른 날엔 하산길에 더러 다친 사람도 있었다.하지만 둘째날 서부능선에서 만난 야생화들이 아픔을 다 잊게 해준 것 같다.
|contsmark13|여행은 사람을 가볍고 투명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거기에 60도가 넘는 술까지 더했으니 오죽했겠는가.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꾸밈없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사람들의 천진한 모습을 보는 것은 언제나 큰 즐거움이다.반주로 마시던 술이 자꾸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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