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휴가특집2 영화평론가 변재란이 권하는 걸작 비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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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로 보는 인간관계의 스펙트럼 … 만물상 같은 세상사
인생의 신비와 가능성 확장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과 희망찾기

|contsmark0|변재란<영화평론가>필자 변재란 씨는 연세대 영어영문학과와 중앙대 대학원 영화학과를 졸업했다. 번역서로 ‘세계영화사’(이론과 실천)를 냈고 ‘페미니즘/영화/여성’(여성사)를 책임편집으로 엮어냈다. 여성문화예술기획에서 페미니즘 연극 ‘자기만의 방’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를 기획했고 ‘여성의 눈으로 본 세계영화사’의 기획과 진행을 했다. 현재 중앙대학교 대학원 영화학과 박사과정의 학생이자 몇 개 대학에서 강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최근 ‘서울여성영화제’ 집행위원이자 아시아-태평양 지역 담담 프로그래머로 활동했다. ‘반쪽이의 육아일기’에 등장하는 반쪽이의 악명 높은(?) 아내이자 하예린의 엄마이기도 하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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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2|인간으로서 더 이상 견디기 어려운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하지만 밀리는 자동차 행렬과 바가지 요금, 피서지에서 인파에 떠밀리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아예 방콕 피서를 생각해보시면 어떨는지? 여름 휴가에 ‘방콕(방에 콕 박혀서)’에서 비디오를 보며 보내는 것, 이것도 휼륭한 피서방법이다. 움직이지 않고도 온갖 좋은 풍광과 인간관계의 스펙트럼과 만물상 같은 세상사를 훑어볼 수 있으니 말이다. 그것도 별로 돈도 안 들이고. 평소에 가족들과 함께 시간 보내기 어려웠다면 가족들과 함께 보는 비디오를 골라 보고 못 나눴던 이야기꽃을 피우는 것도 좋은 방법이며 등골이 오싹한 공포영화니 스릴러영화를 보는 것은 더위를 잊기에는 가장 고전적인 방법이 아닐까? 특히 이른바 영화작가로 불리는 사람들의 걸작들을 보노라면 마치 숨은 그림 찾기처럼 영화사의 행간을 읽는 즐거움도 누릴 수 있다.우리나라에서 ‘마누라와 북어는 팰수록 맛이 난다(?)’는 말로 한 때 이 땅의 남자들의 폭력에 권위를 세워주었다면 프랑스에서는 ‘아이들은 4백번은 맞아야 제대로 큰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바로 이러한 어른들의 심리와 이로 인한 소년의 괴로움과 슬픔을 잘 묘사한 영화가 <400번의 구타>(1959)이다. 50년대 말 프랑스 영화에 새로운 물결을 몰고 온 프랑스 누벨바그의 대표적인 감독 프랑소와 트뤼포 자신의 소년기의 불행했던 기억과 영화광으로서의 추억을 따뜻하게 회상하는 이 영화는 파리에 사는 열세살 먹은 앙뜨완느 드와넬이라는 소년은 결코 모범생이랄 수 없는 앙뜨완느는 수업시간에 여자 사진을 돌려보다가 선생에게 혼나고 수업을 빼먹고 돈을 훔쳐 극장구경을 간다. 영화는 경쟁사회에서 맞벌이로 지친 부모 아래서 눈치를 보는 아이와 부모가 그 아이를 달래고 회유하고 협박하는 과정을 앙뜨완느의 시각으로 조용히 응시한다. 앙뜨완느는 이후 가족과 국가에 의해 범죄자로 간주되는 나쁜 운명에 봉착한 소년이 겪을 수 있는 고통을 얼굴 가득히 담게 된다. 특히 영화의 마지막 장면, 이제 어른들의 골치거리였던 앙뜨완느는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어른들인 관객에게 고개를 돌려 우리를 바라보는데 그의 강렬한 눈빛에 의해 영화는 시가 되고 진실이 된다.그저 기승전결식 구조에 확실한 결말(물론 해피엔딩까지 곁들여서)을 가진 뭔가 화끈한 이야기가 아니라면(이것은 물론 현실이 우울하기 때문이지만) 고개를 돌리던 관객들도 아마 이란 영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를 보고 난 다음에는 생각이 바뀔 것이다. 과연 영화의 소재가 될 수 있을까 싶은 작은 이야기를 가지고 관객의 가슴을 파고드는 장면과 장면 사이에 서린 이야기에 눈길을 돌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란의 어느 시골 마을의 소년이 친구에게 자기 가방 속에 잘못 들어있는 공책을 돌려주기 위해서 소득 없이(결국 친구의 집을 찾는 데 실패하니까) 지그재그 길을 몇번이고 왔다갔다하는 과정에서 이 심성 고운 아이가 때로는 어른들에게 야단맞는 광경을 지켜봐야 하는 이 영화에서 응시이고 관찰이 된다.만약 영화가 응시이고 관찰이라면 현대 그리스의 가장 독창적인 감독이라는 추앙을 받고 있는 테오 앙겔로플러스의 영화 역시 분명 이 범주에 들어간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는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의 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독재와 저항으로 이어져온 현대사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와 유사한 역사적 경험을 갖고 있다. 바로 이런 점령과 압제의 지난한 역사, 그리고 정치의 그릇된 순환사를 예리한 통찰력으로 그린 그의 영화적 경향이 좀 더 시적인 서정성으로 채색된 작품이 <안개속의 풍경>(1989). 그저 아버지가 독일에 있다는 엄마의 말만 믿고 무작정 집을 떠난 어린 남매가 황무지와도 같은 그리스를 여행하면서 겪는 고통스러운 경험들이 주인공을 스쳐 지나간다. 공연할 극장을 찾지 못해 바닷가를 배회하는 유랑극단, 그들은 바로 그리스의 수난사와 맥을 같이 하며 마침내 무대의상들을 바닷가에서 팔고 내놓는 장면에서 그 비극은 절정에 이른다. 시가행진을 벌이는 군인들, 이제 열두살 된 어린 소녀 불라를 강간하는 트럭운전사, 결혼식 피로연 중 울면서 뛰어나가는 신부, 기어코 아버지에게 가려는 불라가 기차요금을 벌기 위해서 매춘에 나서는 것 등 모두가 우울한 풍경들이다. 앙겔로플러스는 이 우울한 풍경을, 절규해도 모자랄 것 같은 그리스의 현실을 오히려 침묵으로 소리친다. 아마도 그의 짐짓 침묵하는 방식은 불라가 트럭운전사에게 강간당하는 장면에서 가장 잘 보여진 것일 게다. 클로즈업을 피하고 대상을 풍경속에 담아놓을 뿐 섣불리 대상을 향해 카메라를 들이대지 않는 그의 스타일은 영화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마치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가 우연히 카메라에 잡힌 듯한 느낌을 준다. 대부분의 주류영화에서 강간 장면이 또 하나의 구경거리가 되고 있는 영화적 재현방법에 이 영화가 선명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는 것은 분명하다.한국영화가 한 때는 로맨틱 코미디의 물결을 이루더니 최근에는 필름 느와르가 지배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다. 분노와 복수, 음모, 범죄 등의 암울한 이야기로 이루어진 이 장르는 <말타의 매>까지 거슬러올라가야겠지만 이 영화를 만든 존 휴스턴이 악당으로 출연한 <차이나타운>(1974)을 보는 것도 색다른 재미다. 더구나 이 영화는 폴란드에서 망명한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눈에 비친 미국의 도덕적 타락을 허무주의와 절망적 시선으로 응시한 영화로 탄탄한 시나리오에 냉소적이면서도 상대적으로 순진한 탐정 기티스(잭 니콜슨), 필름 느와르의 필수 요소인 팜므 파탈이지만 철저하게 비극적인 인물인 에블린(페이 더너웨이)를 통해 치정사건에 가려진 암흑의 오지를 발견한다. 하지만 1930년대가 시대적 배경인 이 영화는 사막에 물을 끌어오려는 시도가 실패한 것처럼 ‘차이나타운’에서 일반적인 사회적 도덕적 규칙은 결코 지켜지지 않는다.스릴러 영화의 거장인 알프렛 힛치콕은 인간의 관음증과 죄의식을 지속적으로 다루어온 감독이다. <현기증>은 동료를 죽게 했다는 죄의식으로 고소공포증을 갖게 된 남자가 결국 자신이 지켜야했던 사랑하는 여자를 고소공포증으로 죽게 했다는 죄의식에 시달리면서 또 한편으로 그녀의 여성성과 죽음의 유혹에 대한 강박관념에 따라 새로운 여자를 재구성하려는 치명적인 욕망을 다룬다. 특히 샌프란시스코를 배경으로 스코티(제임스 스튜어트)의 현기증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줌인-트랙 아웃을 함께 사용한 것은 두고두고 힛치콕 영화의 독창성으로 남아 있다.‘도대체 스타가 뭐길래’라는 궁금증을 누구나 한번쯤 느낄 만큼 스타와 대중문화는 우리들 깊숙히 들어와 있다. 독일이 패전되던 해에 태어났으며 ‘아버지의 영화는 죽었다!’고 선언하며 독일영화를 재건했던 ‘새로운 독일영화’ 감독들 중 가장 나이가 어렸던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이 타고난 아나키스트의 시선은 주로 사회의 소외계층에 머물렀으며 그는 <베로니카 포스의 갈망>(1981)에서 멜로드라마의 뼈대는 살리되 장구하게 대물림된 독일 표현주의 전통과 필름느와르의 양식을 결합시켰다. <선셋대로>라는 빌리 와일더의 걸작을 연상시키면서도 이 영화는 독일이 걸어왔던 지난 시대에 대한 마침표이며 주인공 베로니카 포스의 과거는 독일의 과거이고 현재는 독일의 현재이다. 파스빈더는 여주인공을 나치시대라는 흘러간 시절의 스타로 만듦으로써 지난 시절에 얽매인 그녀의 몽롱함, 그 환상을 깨는 현실, 그리고 현실의 황량함을 철저하게 파헤친다. 영화는 바로 그녀의 과거와 현재의 상처를 들춰내고 그를 구원할 사람으로 스포츠신문 기자를 배치한다. 하지만 개인의 자유가 보호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법은 무력하며 바로 자유의 가치를 대변하는 그 스포츠신문 기자는 그것을 밝혀내는데 실패한다. 파스빈더 영화의 특징인 절망감과 비관주의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물론 그 모든 것을 알기 때문에 관객이 느끼는 비애감은 한층 커진다.과연 인간이 살아가는 데 현실과 환상의 상관관계는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이 고민해온 이 문제를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욕망>은 사진과 판토마임의 은유를 통해 보여준다. 우연히 살해를 목격한 자의식이 강한 사진작가의 눈에 비친 살해와 카메라로 찍힌 확대된 사진이라는 증거는 객관적 현실로 이해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오히려 모더니즘을 지향하는 이 감독은 그 살인 사건 자체보다는 이성과 조화의 비판감각이 포기된 점차 기괴해진 60년대 중반의 도시 런던에 관심이 있다.이란 북부의 시골에서부터 샌프란시스코까지, 193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들은 장르와 소재는 다르지만 인생의 신비와 가능성의 확장에 대해서 끊임없이 도전하고 끊임없이 좌절하면서도 단순히 희망만은 아닌, 그렇다고 절망이라고 할 수도 없는 역사를 담고 있다. 하지만 이 부분적인 성공 안에서도 희망을 꿈꾸는 사람들은 희망을 읽기 마련이다. 마치 뜨거운 폭염 뒤에 어느새 서늘한 바람이 무릎을 간지럽게 하듯이.|contsmark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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