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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2|인간으로서 더 이상 견디기 어려운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하지만 밀리는 자동차 행렬과 바가지 요금, 피서지에서 인파에 떠밀리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아예 방콕 피서를 생각해보시면 어떨는지? 여름 휴가에 ‘방콕(방에 콕 박혀서)’에서 비디오를 보며 보내는 것, 이것도 휼륭한 피서방법이다. 움직이지 않고도 온갖 좋은 풍광과 인간관계의 스펙트럼과 만물상 같은 세상사를 훑어볼 수 있으니 말이다. 그것도 별로 돈도 안 들이고. 평소에 가족들과 함께 시간 보내기 어려웠다면 가족들과 함께 보는 비디오를 골라 보고 못 나눴던 이야기꽃을 피우는 것도 좋은 방법이며 등골이 오싹한 공포영화니 스릴러영화를 보는 것은 더위를 잊기에는 가장 고전적인 방법이 아닐까? 특히 이른바 영화작가로 불리는 사람들의 걸작들을 보노라면 마치 숨은 그림 찾기처럼 영화사의 행간을 읽는 즐거움도 누릴 수 있다.우리나라에서 ‘마누라와 북어는 팰수록 맛이 난다(?)’는 말로 한 때 이 땅의 남자들의 폭력에 권위를 세워주었다면 프랑스에서는 ‘아이들은 4백번은 맞아야 제대로 큰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바로 이러한 어른들의 심리와 이로 인한 소년의 괴로움과 슬픔을 잘 묘사한 영화가 <400번의 구타>(1959)이다. 50년대 말 프랑스 영화에 새로운 물결을 몰고 온 프랑스 누벨바그의 대표적인 감독 프랑소와 트뤼포 자신의 소년기의 불행했던 기억과 영화광으로서의 추억을 따뜻하게 회상하는 이 영화는 파리에 사는 열세살 먹은 앙뜨완느 드와넬이라는 소년은 결코 모범생이랄 수 없는 앙뜨완느는 수업시간에 여자 사진을 돌려보다가 선생에게 혼나고 수업을 빼먹고 돈을 훔쳐 극장구경을 간다. 영화는 경쟁사회에서 맞벌이로 지친 부모 아래서 눈치를 보는 아이와 부모가 그 아이를 달래고 회유하고 협박하는 과정을 앙뜨완느의 시각으로 조용히 응시한다. 앙뜨완느는 이후 가족과 국가에 의해 범죄자로 간주되는 나쁜 운명에 봉착한 소년이 겪을 수 있는 고통을 얼굴 가득히 담게 된다. 특히 영화의 마지막 장면, 이제 어른들의 골치거리였던 앙뜨완느는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어른들인 관객에게 고개를 돌려 우리를 바라보는데 그의 강렬한 눈빛에 의해 영화는 시가 되고 진실이 된다.그저 기승전결식 구조에 확실한 결말(물론 해피엔딩까지 곁들여서)을 가진 뭔가 화끈한 이야기가 아니라면(이것은 물론 현실이 우울하기 때문이지만) 고개를 돌리던 관객들도 아마 이란 영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를 보고 난 다음에는 생각이 바뀔 것이다. 과연 영화의 소재가 될 수 있을까 싶은 작은 이야기를 가지고 관객의 가슴을 파고드는 장면과 장면 사이에 서린 이야기에 눈길을 돌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란의 어느 시골 마을의 소년이 친구에게 자기 가방 속에 잘못 들어있는 공책을 돌려주기 위해서 소득 없이(결국 친구의 집을 찾는 데 실패하니까) 지그재그 길을 몇번이고 왔다갔다하는 과정에서 이 심성 고운 아이가 때로는 어른들에게 야단맞는 광경을 지켜봐야 하는 이 영화에서 응시이고 관찰이 된다.만약 영화가 응시이고 관찰이라면 현대 그리스의 가장 독창적인 감독이라는 추앙을 받고 있는 테오 앙겔로플러스의 영화 역시 분명 이 범주에 들어간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는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