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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정맞은 언론에 끌려 다니지 말자

아무리 맞는 말이라도 할 말과 못할 말이 있다. 더구나 그 말이 맞는지 안 맞는지 애매할 때에는 말을 조심해야 한다. 보통 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도 그럴진대, 하물며 말이나 글로 먹고 사는 언론인들이라면 더욱 더 그렇다. 그런데, 선거판이 어지러워지다 보니 별의별 사람들이 저마다 말을 아끼지 않는 가운데, 언론으로서는 해서는 안될 얘기를 함부로 해대는 경우를 보게 된다.가장 최근에 내 혀를 차게 만든 글은, 어느 주간지가 최근 대선 후보자들의 지역별 지지율을 분석하면서 ‘신라권’이니 ‘백제권’이니 하는 말을 사용한 것이다. 이 글에 따르면, 호남 출신인 김대중을 포함해 충청도 출신인 김종필과 이회창이 사실은 모두 ‘백제권’ 사람이고, 따라서 ‘신라권’인 영남지역에서는 후보가 없어 어쩌고저쩌고 한다는 것이다. 주간지는 속보성이 떨어지는 만큼 갖가지로 분석하고 짜 맞추는 게 일이라 해도, 호남지역과 충청지역을 백제권으로 묶고 영남지역을 신라권으로 대립시키는 발상은 유치하기 짝이 없다. 전라도와 충청도가 백제권이고 경상도가 신라권이면 서울과 경기·강원도는 무슨 권인가? 서울 풍납동 몽촌토성이 백제시대의 유적이라면 한강이남의 서울과 경기도까지 모두 백제권이 돼야 하는 게 아닌가? 중원에 고구려비가 서 있으니 충청북도는 고구려권인가? 그런데, 같은 영남에서도 이른바 TK와 PK가 나뉘어 반목한다는데, 이건 신라와 가야가 대립하던 고대사의 연장인가? 대선후보로 나온다는 조순 시장이 강릉 출신이라면 그는 신라권 후보인가 고구려권 후보인가? 그도 저도 아니면 동해안의 고대국가였다는 동예(東濊)권 후보인가? 국사학계에서도 삼국시대의 경계조차 확실히 밝혀내지 못하는 마당에, 어설픈 상식 따위로 허튼 글을 써대는 일은 시시한 만평(漫評)에서도 통하지 않는다.살펴보면, 진정으로 우리나라의 지역성을 드러내야 할 분야는 따로 있다.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1천3백년 동안이나 통일된 국가였음에도 좀처럼 뒤섞이지 않고 지역적 특성을 간직해온 전통문화, 예를 들면 전통음식, 건축, 관혼상제, 언어(사투리), 민속음악 등이야말로 더 사라지기 전에 그 지역적 다양성을 낱낱이 기록하고 연구해야 할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지역성을 충분히 강조해야 할 또하나의 분야는 지방자치라는 현실정치다. 지방자치야말로 지역의 특색과 주민들의 응집력이 강할수록 성공할 가능성이 크다. 우리의 지방자치가 훨씬 일찍 시작되어 그 안에서 지역주의를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더라면, 오늘날 대통령선거를 도지사 선거쯤으로 착각해 자기 지역 출신에게 몰표를 준다거나 하는 유치한 유권자의식은 사라졌을 것이다.선거판이 끝나고도 한동안은 선거이야기가 이어질 터이니 앞으로 6개월은 지겹게 선거이야기를 듣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신문이 온통 선거판 이야기로 가득하다 하더라도 깨알같은 글씨 들여다보느라 아까운 눈만 혹사시키지 말고 멀찍이서 큰 글자만 읽도록 하자. 그리고 방송을 보고 들을 때는 한쪽 귀로 듣는 소리의 반쯤은 다른쪽 귀로 흘려 버리자. 그래도 대통령선거 때 투표하는 데는 아무 지장 없다. 후보자들간의 정책의 차이라든가 지도자로서의 능력의 차이 등에는 관심도 없이, 오로지 지역주의 따위의 저급한 기준을 가지고 정치가들의 이합집산, 선거전략, 판도분석에만 매달리는 방정맞은 언론에 모두가 끌려갈 이유가 없지 않은가 말이다. 이 글이 혹시 정치적 무관심을 조장할 우려가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언론이 올바른 정치적 시각을 제시해 줌으로써만 대중이 정치적 무관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아직도 대통령을 ‘임금’ 또는 ‘나랏님’이라 하거나 대통령 부인을 ‘국모’라 하는 나이든 분들이 시골 구석에 산재하는 마당에, 언론이 드라마 제목이나 빌려다 대통령을 ‘용’이라 표현한다거나 한술 더 떠 ‘신라’니 ‘백제’니 하는 당찮은 지역구분을 하는 이상, 뜻있는 유권자들조차 점점 더 망국적 지역주의에 낙담하고 정치적 무관심에 빠져버릴 우려가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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