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세대간 정의’와 한미 F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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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세대간 정의’와 한미 FTA
  • 정태인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원장
  • 승인 2011.09.27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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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인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원장

지난 5월 2일자 <PD저널>에 '88만원 세대'의 본질은 ‘세대간 착취’라는 글을 썼다. 내 자식 잘 되게 하겠다고 사교육경쟁, 그리고 부동산 투기경쟁을 한 결과, 극소수의 승리자를 뺀 우리 아이들 모두 ‘88만원 세대’를 만들었으니 결국 그게 ‘세대간 착취’가 아니고 무엇이냐는 요지였다.

이후에도 이 문제는 내 머리를 떠나지 않고 뱅뱅 돌아서, 뭔가 관련 있을 법한 자료를 모으고 읽었다. 결국 세계적으로도 뜨거운 논쟁 한 가운데 있는 개념에 다다랐는데 이름하여 ‘세대간 정의’(intergenerational justice)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연금이다. 전후의 베이비붐세대가 은퇴 후 연금을 타기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쌓은 연금이 바닥났고 급기야 젊은 세대가 번 돈을 현재의 노인에게 바로 건네야 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럼 지금 젊은이들의 연금은 누가 줄 것인가? 인구까지 줄어든다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세대간 정의의 범주에서 가장 풀기 어려운 분야는 자연자원의 분배, 더 넓게 얘기해 ‘지속가능성’ 문제다. 역시 선인들의 지혜에 답이 있는가. 아메리카 인디언의 경구, “자연은 앞 세대에게 물려 받은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로부터 빚내서 쓰고 있는 것”이라는 자연관은 문제의 정곡을 찌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미래 세대에게 얼마의 이자를 갚아야 할까, 즉 미래 할인율이 관건이 된다. 경제학계에서는 이미 적정 할인율을 놓고 논쟁이 시작됐는데 각자 세대간 정의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각양각색의 답을 내 놓을 수밖에 없다.

컨대 재생가능한 자원이야 다음 세대가 쓸만큼 남겨두면 된다지만 석유나 석탄과 같은 재생불가능한 자원은 어떻게 해야 할까? 먼 미래까지 생각한다면 당장 우리의 소비를 0까지 줄여야 하는데 그게 실행 가능한 일일까?

하지만 어느 누구도 이 골치 아픈 문제로 하루 종일 머리를 싸매지는 않을 것이다. 기후변화는 어쩌면 우리 아이들의 아이들 정도면 겪을 법한 문제인데도 우리에겐 너무 멀게 느껴지고, 또 스케일도 크기 때문이다. 사교육처럼 당장 우리가 합의만 하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각자 도생하는 바람에 아이들 모두를 죽음의 고통 속에 몰아넣는 판에 어찌 이렇게 큰 문제를 다룰 수 있을까. 세대간 정의라니 내 일이 아닌 남의 일로 느껴질 것이다.

2006년 2월, 협상을 시작했을 때부터 끊임없는 논쟁의 대상이었던 한미 FTA 역시 너무나 커서 실감이 나지 않는 문제에 속한다. 지난 5년간 반대파들이 주야장천 외쳤고, 정부가 ‘괴담’이라고 일축한 주장들, 예컨대 김현종 당시 통상교섭본부장이 먼저 미국에 매달린 결과 ‘4대 선결요건’이라는 것이 있었고 외교부가 마치 미국 관리인 것처럼 우리나라의 약값 정책에 압력을 가하고 있으며, 심지어 외교부 관리가 훈령을 위반하면서까지 개성공단 문제에서 미국 편을 들었다는 사실, 대통령이 기꺼이 쇠고기를 넘겨주었다는 사실을 위키리크스가 폭로했어도 우리는 그저 무덤덤하다. “그래, 그럴 줄 알았어”, “나쁜 놈들, 거의 매국노 아냐?” 이 정도가 아닐까?

 

▲ 정태인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원장
한미 FTA가 아무리 어마어마한 사안이라 해도 ‘세대간 정의’만큼 막막하지는 않다. 김현종의 주장대로 미국식 법과 제도를 한국에 들여오는 것이 한미 FTA의 본질이다. 그리고 현재진행형인 금융위기는 그 미국식 제도의 실상을 드러냈다. 답은 아주 명쾌하다. 우리가 서두를 이유는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미국이야 이제 살 길이 수출밖에 없으니 곧 한미 FTA를 비준한다지만 왜 우리가 그래야 하는가? 미국처럼 건강보험을 없애야 우리 아이들의 미래가 밝아질까? 아무리 미국에 대한 환상에 정신이 마비됐다고 해도 조금 더 두고 본 뒤 처리하면 안 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한미 FTA는 바로 내 일이요, 우리 아이들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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