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의 눈] PD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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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의 눈] PD의 운명
  • KBS 전주 김광수 PD
  • 승인 2011.11.30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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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전주 김광수 PD

나는 지난주 집에서 구독하는 일간신문을 단 한 줄도 읽지 못 하고, 모두 거실 한 구석에 고이 모셔 두었다. 휴먼 다큐멘터리 〈세상사는 이야기〉 촬영을 여하튼 이번 주 내에 끝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프로그램의 방송시간이 정해지는 순간, 세상의 모든 PD는 긴장하기 시작한다. 한 번 정해지면 신성불가침의 영역이 돼 버리는 방송시간을 맞추기 위해서는 프로그램에 올인 해야 하는 게 PD의 운명이다.

매일 아침, 출근하는 내 뒤통수에는 ‘보지도 않을 신문을 돈 주고 보냐’는 아내의 원성이 연신 귓전을 때렸다. 일단 촬영을 끝낸 후, 엄청난 분량의 신문을 한 번에 읽겠노라는 생각을 했지만, 사실 이 다짐이 실현된 적은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렇게 촬영을 강행군해도 방송까지는 열흘 가량 남는다. 가편집과 보충 촬영 그리고 후반 작업을 생각하면 여유 있는 시간이 아니었다. 적어도 지난 일주일 동안 나는, 우리 ‘가카’께서 말씀하시는 ‘오해다’, ‘내가 예전에 해 봐서 아는데…’와 같은 주옥같은 명언들을 접할 기회조차 없었다. 불충하게도….

불충을 저지르니 날벼락이 떨어진 것인가?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국회 날치기 역시 나는 모르는 일이었다. “아버님, 〈뿌리 깊은 나무〉보셨으니, 이제 〈KBS뉴스라인〉 보시죠. 아무래도 KBS에서 나갈 방송이다 보니…”  PD로서 겸연쩍은 부탁을 출연자에게 드리고, 아무 생각 없이 카메라 감독에게 큐사인을 주는 순간, 내 눈에 들어온 TV의 첫 장면은 아수라장이 된 국회였다. ‘한미FTA,  야당 저지 속 국회통과’라는 커다란 헤드라인에는 ‘날치기’라는 단어는 보이지 않았다. 상황은 분명 날치기였지만, 적어도 그 날 KBS뉴스(솔직히 잘 보지 않기 때문에, 다른 날 뉴스는 어떤지 모른다)에서 그 상황은 날치기가 아니라 국회 통과였다.

한미 FTA의 장밋빛 청사진만 나부끼는 뉴스, 단지 여당과 야당의 주장을 무심하게 중계 방송하는 뉴스, 아! 최루탄 던진 야당 국회의원을 강하게 꾸짖는 건 잊지 않았지. 순간 울화통이 치밀고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몰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촬영 중이었다. 나는 분노하고 있었지만, 그 순간 내게 중요한 것은 더 좋은 카메라 앵글과 편집에 필요한 다양한 커트였다.    

▲ KBS 전주 김광수 PD
이렇게 촬영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은 항상 마음이 무겁다. ‘소용돌이치는 세상은 나 몰라라 하고, 사람들에게 뻔 한 동정심이나 프로그램에서 강요하지 않나?’라는 자괴감이 들기 때문이다. 이것도 PD의 운명이겠지 하며 애써 자위하고 싶지만, 내일은 꼭 온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나는 꼼수다’ 겨울용 후드티와 가카헌정달력 3종 세트라도 구매해야겠다. 민주언론상 대상에 빛나는 그들의 외침 속에 부끄러운 내 목소리 한 자락 얹고 싶기 때문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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