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의 눈] 파키스탄 사법부의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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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의 눈] 파키스탄 사법부의 용기
  • 김영미 국제분쟁전문PD
  • 승인 2011.12.12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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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미 국제분쟁전문PD
4년 전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에서의 일이다. 당시 나는 대통령 ‘무샤라프 퇴진운동’이란 역사의 한 가운데 있었다. 이슬라마바드는 매일 대통령 규탄 시위가 벌어지고 이를 진압하는 경찰과 최루탄으로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대통령 궁 근처 시위를 취재하던 어느 날 가슴 뭉클한 장면을 봤다. 시위대와 파키스탄 공권력 사이로 양복 입은 판사들이 몰려 나와 시위대를 가로막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이 시위대를 해산시키려는 의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외쳤다. “우리들은 파키스탄의 판사들이다. 국민들을 건들지 마라. 우리는 국민들을 보호할 것이다.” 예상치 못했던 놀라운 광경이었다. 판사들 뒤에는 모든 재판 일정을 거부하고 거리로 뛰쳐나온 파키스탄 변호사협회 소속 변호사들이 있었다.

판사와 변호사들은 “독재 정치를 멈추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민들 앞에 섰다. 파키스탄 전통 복장을 한 시민들은 친구랑 싸웠을 때 큰 형을 만난 아이들처럼 의기양양하게 서있었다. 파키스탄 경찰들은 이들을 해산시키려고 최루탄을 쏘며 폭력을 휘둘렀다. 판사와 변호사들도 양복이 찢겨나가고 경찰에게 연행됐다. 그들은 끝까지 ‘독재 타도’ 구호를 외쳤다.

무샤라프 대통령은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군인이다. 당시 3선에 도전하는 그에게 법원은 대통령 자격 논란을 가리는 헌법 소원에서 이의를 제기했다. 화가 난 무샤라프는 군 병력을 동원해 초드리 대법원장을 법원 밖으로 끌어냈다. 파키스탄 사법부가 무샤라프의 대통령의 자격에 제동을 건 것은 큰 용기를 필요로 했다.

파키스탄 언론도 마찬가지였다. 독재정권이 방송까지 송출 중단하며 언론 통제를 했음에도 신문은 발행을 계속했다. 파키스탄 언론인들도 입에 테이프를 붙이고 나와 침묵시위를 했다. 그들이 들고 있던 피켓에는 “우리에게 침묵을 원하지만 언론은 그럴 수 없다”라고 쓰여 있었다. 파키스탄 언론은 시위대에 동참한 파키스탄 사법부를 지지하는 기사를 썼다.

파키스탄의 유력 일간지 〈더 뉴스〉기자 모하마드는 파키스탄 사법부에 대한 자긍심을 갖고 있었다. “우리 시민들은 참 행복하다. 독재 정부에 대해 ‘NO’라고 말할 수 있는 사법부가 있기 때문이다.” 고문과 불법 연행이 당연시되었던 독재상황에서 사법부와 언론인들의 용기는 대단했다. 파키스탄은 그해 겨울 무샤라프 대통령을 권좌에서 몰아내고 새로운 민주 정부를 건설했다.

최근 한국의 현직 판사 166명이 사법부에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재협상 연구를 위한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야 한다는 건의문을 제출했다. 이 상황을 보고 나는 불현 듯 그 날의 파키스탄 사법부가 생각났다. 국민의 반대를 무릅쓰고 정치권이 통과시킨 한미 FTA를 법관들이 제동을 걸며 조약의 불평등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 4년 전 파키스탄과 흡사했다. 추운 겨울물대포 맞아가며 시위에 나섰던 시민들에게 법관들의 용기는 큰 힘이 되어 주고 있다.

▲ 김영미 국제분쟁전문PD
삼권분립에 비춰볼 때 판사들의 행동이 옳지 않다는 비판도 있지만 이들도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시민이다. 사법부에 대한 신뢰는 국민들에게 강요만 한다고 생기는 게 아니다. 국민의 뜻과 함께 할 때 비로소 생기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사법부는 가진 자들의 편’이라는 선입견을 버리게 해준 166명의 한국 판사들에게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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