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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까지 보여줘야 다큐의 진실성이 의심을 받지 않을 수 있을까?

크리스마스가 다가온다. 그런데 정치도, 경제도 영국 국민이 즐거워할 만한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다. 정치와 경제 모두 국민의 울화를 돋울 뿐이다. 그런 국민의 마음을 BBC가 어루만지고 있다.

BBC가 자연다큐멘터리 <프로즌 플래닛>(Frozen Planet)을 전 국민의 안방에 선사한 것이다. 평균 800만명이 TV 화면에 눈을 고정시키고 있다. 시청자들은 각종 매체에 “역시 BBC”라는 찬사를 보내며 매회 이어지는 감동의 호사를 누리고 있다.

<프로즌 플래닛>은 북극과 남극을 비롯해 얼음으로 뒤덮인 극지대의 사계절을 담은 총 7편의 자연 다큐멘터리다. 4년 동안 280억원을 투자해 제작했다. 영하 50도의 극한에서 38명의 최고의 카메라맨들이 특별 제작된 첨단 촬영 장비를 동원해 하늘과 땅, 수중과 지하에서 온갖 생명체와 자연의 모습을 담았다.

<프로즌 플래닛>은 중국을 비롯해 30개국에 팔렸다. BBC 입장에선 비싼 시청료를 지불하는 영국 국민에게 충분히 밥값을 치른 셈이다.

그런데 난데없는 의혹 하나가 제기됐다. 5회차인 ‘겨울’ 편에서 북극곰이 새끼를 낳는 장면과 관련해서다. 전후의 장면은 북극의 눈 덮인 자연이 분명한데 새끼가 탄생하는 장소는 자연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 BBC <프로즌 플래닛> 조작 논란과 관련해 <가디언>이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85.1%가 문제될 게 없다고 답했다.
BBC는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문제의 장면이 네덜란드의 한 동물원에서 촬영한 것임을 밝히면서 자연 상태에선 해당 촬영이 불가능했다고 주장했다. 50년 경력의 자연다큐 전문 프리젠터 데이비드 아텐버러 역시 “무리하게 촬영을 시도하다가는 새끼나 카메라맨을 죽일 수도 있는 장면”이라고 항변했다.

꼼꼼하고, 원칙에 철저하다는 BBC가 왜 이런 허점을 보였던 것일까? <프로즌 플래닛>의 특이한 점을 하나 꼽으라면 자막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장소와 등장인물의 이름, 나아가 인터뷰 내용까지 친절하게 자막을 띄우는 우리네 다큐멘터리와는 다른 방식이다. <프로즌 플래닛>은 시종일관 어떤 군더더기도 없이 그림 자체만 보여준다. BBC로고가 작게 왼쪽 상단에 뜨기도 하지만 그것조차도 의식하기 힘들 정도로 잠깐씩만 보일 뿐이다.

등장인물의 이름도 내레이션으로 들려줄 뿐, 자막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롱테이크가 많고, 장면은 느리게 바뀌지만 뛰어난 화질과 형용할 수 없는 장관, 그에 부합하는 사운드와 중후한 내레이션에 압도되어 시청자는 눈을 떼지 못한다. 거기엔 자막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런데 이토록 깔끔한 편집에 단 한 장면을 위해 자막을 사용한다? 혹은 내레이션으로 장황해 질 수 밖에 없는 촬영 뒷얘기를 들려준다? 작품의 완성도가 현격히 떨어질 수밖에 없는, 그래서 고조됐던 감동이 꺾일 수 있는 그런 상황을 시청자들은 원할까?

이와 관련해 미디어 청문회라고 할 수 있는 ‘The Leveson Inquiry’에서 한 위원이 질문을 던졌다. “문제의 사실을 방송 중에 고지하지 않고, 800만 시청자중 극히 일부만 볼뿐인 홈페이지를 통해 알린 이유가 뭔가요?”

마크 톰슨BBC 사장 은 이렇게 답했다. “3~4년 전 실시한 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시청자들은 프로그램이 방송되는 중간에 분위기를 깰만한 자막이나 부연설명을 원치 않으며 프로그램이 끝난 후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해 주길 원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BBC는 그런 시청자의 요구대로 홈페이지를 통해 문제의 장면이 동물원에서 촬영된 것임을 밝힌 것입니다.”

<가디언>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그 장면이 어디서 촬영되었든 문제될 게 없다고 답한 응답자가 85% 이상으로 나타났다. 네덜란드의 동물원 측도 BBC가 담아낸 그림에 찬사를 보냈고, 시청자들도 가디언의 여론조사가 보여주듯 어디서 찍은 게 무슨 문제냐 그런 장면을 담아냈다는 자체가 대단하다는 분위기다.

심지어 미디어 청문회의 위원들도 문제제기와는 별도로 <프로즌 플래닛>을 “최고의 다큐다”, “무척 즐겁게 시청했다” 등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조작설을 제기한 사람들의 모양새가 이상해져 버린 거다. 역시, 프로그램은 잘 만들고 볼 일이다.

▲ 영국=장정훈 통신원 / KBNe-UK 대표
참고로, 이번 논란과 관련해국내 언론에 “데이비드 아텐버러경이 제작한” 또는 “아텐버러경 조작 파문” 하는 식으로 기사가 났던데 데이비드 아텐버러는 제작자가 아니라 경험 많은 프리젠터일 뿐이다. 그는 다큐를 제작하거나 조작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

아무튼 올해 연말 영국 국민들은 BBC의 다큐를 보며 울적한 마음을 달랠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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