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행의 편지] “최상재라는 PD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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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숙 지도위원에게

다시 겨울입니다. 밤늦은 귀가는 늘 고단하고, 칼바람이 훑고 지나가는 정류장에서 막차를 기다리며, 어미 아비들은 발을 동동거립니다. 가난한 자에게는 버스마저도 왜 그리 오지 않는 것인지요.

버스…. 저는 트위터라는 걸 처음 시작하면서 프로필 란에 그렇게 써 놓았더랬습니다. ‘기다리는 막차는 오지 않는다. 걸어서 가라’, 그렇게요. 헛된 희망이 얼마나 사람을 더 힘들게 하고 절망케 하는 것인지, 잘 아시지요.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오지 않는 차를 기다리면서 누구를 원망할 필요도 없이, 뚜벅 뚜벅 제 발로 걸어가는 게 차라리 낫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그 버스가, 늦도록 기다려도 오지 않는 그 버스가, 당신으로 인해 연대와 희망 상징이 되었습니다. 지난 여름, 부산으로 가는 버스를 탔습니다. ‘2차 희망버스’였습니다. 장대비 속에서 부산역 광장을 가득 메운, 경향 각지의 노동자 학생 시민들은 참으로 장관이었습니다. 당신이 있는 85호 크레인을 향해 다리를 건너는 이들은 모두 들떠 있었습니다. 그처럼 밝은 투쟁을 저는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한 사람을 향했던, 그리고 그 한 사람이 품은 세상을 향했던, 그 크고도 뜨거운 행진은 마침내 승리를 일구어냈습니다. 그 날, 당신은 환하게 웃으며 크레인을 내려왔습니다.

▲ 최상재 전 언론노조 위원장 ⓒ언론노조
최상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영방송 SBS의 PD입니다. 그는 전국언론노동조합 위원장을 하는 근 3년 동안을 길에서 보낸 거나 진배없이 살았습니다. 언제나 열정과 흥이 있고, 또한 분노와 희망이 있어, 늘 지치지 않아 보이는 사람입니다. 그를 처음 보았을 무렵 그런 말을 몇 번 들었습니다.

“당신들(KBS나 MBC 소속 조합원들)은 SBS에서 몇 달을 못살고 화병이 나서 죽거나 회사를 그만 둘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서 노동조합을 한다는 건 인생 자체를 거는 것이다. 사주(社主)가 있는 회사란 그런 것이다.”

최상재. 그와 더불어 한국 언론사에 한 장으로 기록될 탄압과 투쟁의 시기를 2년 남짓 함께 하면서 참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며칠 전 그가 SBS 사측으로부터 대기발령 통보를 받았습니다. 언론악법반대 투쟁으로 인한 형사재판 결과 유죄를 받았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통상 해고로 가는 수순이니, 이미 ‘반(半)해고’상태인 셈입니다. 우연히 그 사실을 전화로 통보받는 자리에 함께 있게 되었고, 그의 얼굴을 옆으로 잠시 보았습니다. 광장과 거리, 그리고 국회에서 포효하던 호랑이 같던 얼굴도 그새 많이 수척해졌습니다.

건설회사 태영이 지배주주로 있는 언론사 SBS. 아버지로부터 권좌를 물려받은 젊은 세습사주가 지배하는 SBS. 그 안에서 노동조합을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그의 말은 지금 현실이 되었고, 그는 스스로 증거가 되었습니다.

▲ 이근행 전 언론노조 MBC본부 위원장
‘알아서 나가라’는 저들의 요구에 맞서 이제 그는, 인사부서 한 구석에서 몇 달이 될지 모를 수모의 시간을 견뎌내야 합니다. 그가 이 치욕에 지치지 않도록 해야 할 의무가, 그리고 무사히 자신의 일터로 돌아가게 해야 할 의무가, 지금 ‘무사한’ 자들에게 있습니다. 당신이 웃으며 85호 크레인을 내려올 수 있었듯, 최상재라는 한 PD도 웃으며 자신의 일터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희망은 막차처럼 늘 더디게 옵니다. 막막하게 막차를 기다리는 게 너무 싫어서 써놓았던 명구(名句)를 보고 사람들이 제게 말했습니다. 너무 팍팍하다구요. 그래서 얼마 후 바꿨습니다. 그래도 계속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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