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들이 테이프를 끊었다. 아흔네 명이 같은 목소리로 방송 민주화를 선언하는 성명서를 냈다. “여긴 뭐 하러 온 거야. 찍어봤자 방송도 안 될걸. 물러가라.” 하루 단위로 일하는 기자들은 매일 취재 현장에 나가 갖은 수모를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다. 보도 현장은 자괴감과 무기력감이 지배했다. “제가 열심히 취재해서 부른 기사가 회사에 돌아와 보면 쓰레기통에 쳐 박혀 있었다. 그걸 보는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런 심정은 나 개인만이 아니라 보도국 내 기자들 대부분이 느끼는 것이었다.” 지금 앵커로 있는 기자는 이렇게 말했었다. 자긍심이 간절했다. 자유가 절실했다.
피디들이 일어섰다. 기자들이 권력의 압력을 데일리로 받아내야 했다면 피디들은 위클리, 또 먼쓰리(monthly)로 일해야 하는 선전요원이었다. 드라마 피디가 야심차게 기획한 정치 드라마도, 정경유착을 고발한 기업 드라마도, 권력의 불만을 사면 제 명을 다하지 못했다. 교양피디에게는 걸핏하면 권력자의 치적을 홍보하는 특집 프로그램 오더가 떨어졌다. 홍보 냄새가 너무 나지 않게 나름 작품성을 갖춘 프로그램으로 완성해내려 심혈을 기울이는 것이 재수 없는 피디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예능 피디라고 마음이 편할 수 없었다. 참신하고 훌륭한 오락 프로그램들조차 우민화, 탈정치화의 도구라는 의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사실 직종은 상관이 없었다. 방송사에서 일하는 것은 자랑이 아니라 부끄러움이었다.
전 구성원이 떨쳐 일어났다. 나흘간의 파업. 노사 간 단체협약이 타결됐다. 관제 방송에서 민주 방송으로 변모할 수 있는 분기점이 마련되었다. 새 사장이 선임됐다. 새 사장이 말했다. “예속과 굴종의 시대를 마감하고 새 시대에 맞는 좋은 방송을 준비해야 할 시점이다. 비민주적 요소는 청산되어야 하며, 새 방송 문화를 위한 방송 체제 정비와 내부 개혁을 서둘러 추진해야 할 것이다.” 1988년 여름, 방송사상 최초의 파업에서부터 1989년까지 MBC에서 있었던 일들이다.
1989년 4월 30일, MBC는 <특별기획 MBC를 말한다>를 방송했다.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고, 진정으로 좋은 방송을 하겠다는 다짐이었다. 방송에 즈음해, 시청자들이 MBC에 대해 갖고 있는 불만의 구체적 내용을 조사했다. 불공정하다(38.6%), 흥미 위주다(19.1%), 자율성을 상실했다(12.9%), 미래성이 부족하다(11.1%), 다양성이 부족하다(7.8%)는 지적이 나왔다. MBC가 누구를 위한 방송이라고 생각하느냐는 물음에는 국민(19.7%)보다 정치인(80.3%), 야당(20.1%)보다 여당(79.9%), 노동자(14.8%)보다 사용자 (85.2%), 빈자(13.8%)보다 부자(86.2%), 노년층(40.6%)보다 젊은 층(59.3%)이라는 답이 나왔다.
국민들의 눈에 비친 MBC는 권력과 기득권익의 옹호자이자 선전수단, 흥미위주로 영리만을 추구하는 상업방송에 다름 아니었다. 무엇보다 국민들의 신뢰 회복이 급했다. 이후 이십여 년, 숱한 우여곡절을 거쳐, MBC는 달라졌다. 국민들이 가장 신뢰하는 언론사, 가장 사랑받는 방송사가 되었다. 권력의 품에서 완벽하게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기자들도, 피디들도, 어느 언론사보다 자유롭게 토론하고, 취재하고, 방송할 수 있다고 믿었고 거의 그랬다.
2012년 1월 6일 MBC 기자회가 성명을 발표했다. 기자들은 지난 1년간 MBC 뉴스가 추락을 거듭한 원인이 편파, 왜곡, 불공정한 보도에 있음을 지적했다. 공정방송, 인권존중, 보도의 자율과 독립을 명시한 MBC 방송 강령을 지켜내지 못한 것에 대해 공영방송의 주인인 국민과 시청자에게 사죄하면서, 보도 책임자의 사퇴를 요구했다. 회사는 특보를 내 기자들의 지적이 사실과 다르며, 기자들의 행동이 사내 질서를 문란케 하는 고로, 회사의 자제 요청을 따르지 않을 경우 해사 행위로 간주, 엄정하게 징계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