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의 눈] 가난이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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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의 눈] 가난이 ‘죄’
  • 김승희 독립 PD
  • 승인 2012.01.18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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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희 독립 PD

지난 여름과 가을 사이, 캐나다로 이민 갔던 이종 사촌 오빠가 10년 만에 처음 한국에 돌아왔다. 이모 생신에 맞춰서 오기 위해 몇 개월을 벼르고 벼렸을 텐데…. 이모가 계신 요양원으로 가는 내내 오빠의 얼굴이 무거웠다.

나이 60이 다 돼서야 일을 손에서 놓을 수 있었지만 일을 그만 두고는 몸이 많이 아프게 된 이모는 오빠가 한국을 떠날 즈음 자신이 파킨슨병에 걸렸다는 걸 알게 됐다. 점점 근육이 굳어지는 병이라 이제는 혼자서 거동조차 힘들 정도다. 많이 여윈 이모를 본 순간 이제 40이 넘은 오빠가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아들을 안아줄 힘조차 없는 이모는 그런 아들에게 떨리는 손을 내밀었다. 

송파구 거여동. 돌산이 있고 논밭이 있었던 서울의 변두리 한 동네에 이모집과 우리집이 있었다. 내가 여섯 살 때까지 그 동네에서 우리 두 가족은 함께 살았다. 단칸방에 아궁이가 있는 부엌, 거친 시멘트벽, 그 집에서 이모, 이모부, 그리고 큰오빠, 작은 오빠 모두 네 식구가 살았다. 이모와 이모부는 항상 아침 일찍 일을 나가 어두워져야 들어오셨고, 오빠들은 학교에서 돌아오면 바로 조그만 접이식 밥상을 펴고 공부를 시작했다.

그런 오빠들 옆에 앉아서 ‘ㄱ’, ‘ㄴ’을 배웠던 기억이 난다. 오빠 둘 다 공부를 잘하고 착해서 동네 사람들은 모두 이모를 부러워했다. 그러나 가난 때문에 큰오빠는 대학을 포기해야했고, 작은 오빠는 좋은 성적에도 장학금을 주는 대학교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대학교 다니는 내내 장학금에 잠시라도 아르바이트를 쉬지 않았던 오빠는 이모의 자랑이었다.

대학교 졸업 후 오빠는 당당히 대기업에 들어갔다. 그 즈음 이모도 40년 넘게 열심히 일한 대가로 자그마한 아파트를 장만하게 됐고, 큰 오빠, 작은 오빠 모두 결혼을 하고 안정을 찾아갔다. 이모네가 드디어 그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어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IMF가 터졌고 대기업에 다니던 작은 오빠는 소위 말하는 명문대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가장 먼저 퇴출리스트에 올랐다고 했다. 지금까지 아무 배경도 돈도 없는 오빠가 여기까지 살아오는 것도 참 힘들었을 텐데…. 그동안 참아왔던 모든 것이 한 번에 폭발해 버렸고, 오빠에게 큰 정신적 고통으로 다가왔다.

그 때 언니는 둘째를 임신하고 있었고, 일자리를 잃은 상태에서 다시 가난 삶을 이어가야 했다. 1년을 버티고, 2년을 버텼다. 내 자식에게만은 그 지긋지긋한 가난을 물려주기 싫었는데 앞은 깜깜하기만 했단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이 나라를 떠나는 것이었다. 열심히 착하게 살았음에도 힘든 삶을 벗어날 수 없는, 희망이 없는 이 사회에 대한 배신감 때문에 더 이상 이곳에 살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이모는 오빠를 잡을 수 없었다.

그리고 10년이 지났다. 작은 오빠는 이모에게는 불효자가 됐지만 캐나다로 간 걸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조카들은 지금 영재로 뽑혀서 캐나다에서 지원해주는 영재교육을 받고 있다고 했다. 돈 없이는 한국에서 꿈 꿀 수도 없는 교육들을….

▲ 김승희 독립 PD

서울에 살고 있는 큰 오빠는 언니랑 맞벌이를 하면서 여전히 부지런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전교 일등으로 중학교에 입학했다는 아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거의 없단다. 경제력과 부모의 노력이 성적을 좌우한다는 대한민국, 큰 오빠는 무능력한 부모 때문에 아들이 하고 싶은 공부를 맘껏 하지 못할까봐 항상 걱정이라고 한다. 보름 정도 한국에 머물렀던 작은 오빠는 떠나면서 이모에게 연신 죄송하다는 말을 했다. 이모는 이번에도 차마 가지 말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지금 가면 언제 또 올 수 있냐는 말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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