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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호 PD의 되감기]

▲ <벌집의 정령 The Spirit of the Beehive> (감독 빅토르 에리세, 1973, 스페인)
빈 집의 아이들

밤늦도록 파티를 즐기다 들판을 걸어 집으로 돌아가는 한 소년이 있다. 달은 밝지만, 을씨년스러운 밤. 터벅터벅 걷는 그의 눈앞에서 갑자기 길의 자취가 사라진다. 대신 아주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소년의 발길을 막는다. 순간 달빛이 환한 만큼 검은 실루엣을 띠고 있던 나무 몸통 위로 바람이 소슬하니 인다. 밑동에서 꼭대기를 향해 기어오르던 바람은 어느새 모든 잎사귀를 뒤집는 거대한 힘으로 변하고 나뭇잎들은 하얀 뒷면을 드러낸 채 파드득 떤다. 마치 보이지 않는 존재가 아주 잠깐 그에게만 모습을 드러내는 계시의 순간처럼. 불현듯 소년에게 허기와 피로가 몰려든다. 몸을 가누지 못하는 그는 근처를 헤매다 버려진 빈 집을 발견한다. 그 곳에서 누군가 남기고 간 곰팡이생긴 옥수수 빵을 주워 먹고 잠이 든다. 포르투갈의 대문호 주제 사라마구(José Saramago)의 매력적인 자서전 <작은 기억들 Small Memories>(2009)에 나온 장면이다.

빅토르 에리세(Victor Erice) 감독의 <벌집의 정령>에도 들판 위 빈 집을 조심스레 방문하는 어린 소녀 아나(Ana)가 등장한다. 1940년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의 황량한 평원. 아나와 이사벨 자매가 내려다보는 빈 농가. 그 앞에는 외로운 나무 한 그루와 더러워진 우물 하나가 있을 뿐이다. <벌집의 정령>에서 평원 위 버려진 빈 집은 육각형의 벌집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아나 가족이 살고 있는 집 유리창 무늬 역시 벌집 모양이다. 지나친 비약이 아니라면 벌집은 당시 프랑코 파시스트 정권 치하의 스페인을 상징하는 것이며 버려진 집과 검은 우물 속은 1970년대 후반까지 억압받던 스페인 국민들의 피폐한 내면의 풍경이었을 것이다. 동생 아나는 그 집에 괴물의 정령이 살고 있다고 믿고 있다. 어느 날, 그 빈 집으로 발을 다친 탈영병 한 명이 숨어든다. 그를 우연히 발견한 아나는 먹을 것과 아버지의 외투를 몰래 가져다준다. 그러던 중, 밤의 적막을 깬 기관총 소리는 그(괴물)와 아나의 짧은 우정을 깨버린다.

투명한 검은 눈동자

흔히 영화 속에서 아이들의 말없는 시선은 어른들의 사회를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정치적 은유로 사용된다. 하지만 아이들의 검은 눈동자에 비친 삶의 보편적인 미스터리는 도식적인 정치적 해석을 넘어선다. 돌이켜보면 어릴 적 세상은 온통 수수께끼와 비밀로 가득한 곳이 아니었던가. 초저녁 잠결에 들었던 음모를 나누듯 소곤대던 어른들의 대화.

늙은 개들은 줄곧 모든 세상사가 귀찮다는 듯 누워 세상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녀석의 눈동자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이미 맑고 검은 색을 잃은 지 오래다. 늙는다는 것은 세상에 대한 비밀과 호기심이 사라진다는 것, 식어버린 욕정의 찌꺼기가 탁하게 가라앉은 어떤 흐릿함이다. 어떤 의미에서 아이들의 검은 눈동자는 빈 집을 닮아있다. 밤바다 속처럼 깊지만 투명한 어둠. 물끄러미 세상을 목격하고 기억하는 그들의 눈동자 속에는 우리가 아직도 풀지 못한 삶의 비밀들이 담겨있다. 정말로 세상에는 괴물들이 살고 있거나 거대한 운명의 힘이란 게 있는지 모른다.

우리의 빈 집은 어디인가

이제 그녀를 위해 나는 그녀의 집 아궁이의 재를 모두 끌어낸다/
그녀는 나로부터도 자유로이 빈집이 되었다
- 가재미3 / 문태준 -


▲ 오정호 EBS PD·EIDF 사무부국장
빈 집에 대한 우리의 기억은 비단 어릴 적에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암투병을 하며 가재미처럼 두 눈이 붙어버렸던 노모. 그녀의 상을 치르고 아들은 그녀가 살던 빈 집을 찾는다. 아궁이의 재를 긁어내며 마지막으로 그녀를 추억하고 먼 그 곳으로 건네준다.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가끔, 누군가 홀연히 떠나버린 빈 집의 식어버린 방바닥 위에 서게 되곤 한다. 발바닥의 차가움으로 느닷없는 비애를 느낀다. 빈 집에서 세상을 예감하던 아이는 빈 집을 받아들임으로써 비로소 어른이 된다.

어쩌면. 빈 집에는 늘 그 곳에 가야만 만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삶의 슬픔들이란 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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