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종편 출범과 외주제작사의 절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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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외주제작사 대표에게 들은 얘기다. ‘희망과 절망’. 그는 지난 몇 달간 종합편성채널(이하 종편채널)과의 관계를 이렇게 말했다. 대부분의 외주제작사들이 그랬듯이 그도 종편채널 출범을 기다렸다. 자체제작보다는 어차피 외주제작에 의존해야 하는 종편채널의 출범은 외주제작사들에게는 기회임이 분명했다. 많은 일거리들이 외주제작사에 몰려들 터였다.

그에게도 기회가 왔다. 지난해 8월부터 한 종편사와 프로그램 논의를 시작했다. 프로그램 기획과 제작능력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진 지상파 PD 출신인 그에게 종편사가 서둘러 제의를 한 것이다. 일주일에 5회 방송하는 평일 저녁 6시대 한 시간짜리 생활정보 프로그램을 해달라는 제의는 그야말로 ‘희망’이었다.

9월 말에 프로그램 윤곽이 잡혀지자 제작진을 구성했다. 4개의 종편채널 개국을 앞둔 터라 제작요원을 모으기가 어려웠으나 그는 그의 명성으로 다른 외주제작사보다는 어렵지 않게 30여명의 PD와 작가 등으로 제작진을 구성했다. 그리고 12월 방송을 시작했다.

그런데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졌다. 방송 2주 만에 종편사로부터 일방적인 제작 중지 통보를 받은 것이다. 사전 예고도 없었다. 사고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방송 2주 만인데다 종편 전체가 바닥을 기는 시청률이어서 경쟁력 운운할 처지도 아니었다.

그 시간대에 재방송 편성을 한 것으로 보면 어떻게든지 비용을 줄여 보려는 처사로 보인다. 그를 보고 제작팀이 된 30여명의 제작진은 불과 몇 달 만에 다른 일자리를 찾아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그는 ‘절망’을 이야기하면서 이 일에 손을 떼고 싶다고 했다. 

비슷한 일을 당한 제작사들이 많았다. 평일 저녁 시간대 60분물 생방송 프로그램을 맡은 한 제작사 역시 2주 만에 제작 중지 통보를 받았다. 금요일 오후 당일 생방송을 준비하고 있는 제작사에게 다음 월요일부터 제작을 그만 두라는 통보였다.

▲ 지난해 12월 22일 오전 지식인들이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조중동 종편 출연 및 인터뷰 거부 선언을 하는 모습. ⓒ언론노조

어렵게 협찬을 받아 제작하기로 한 프로그램은 편성시간대가 일방적으로 바뀌면서 사라지기도 했다. 협찬사가 편성시간 변경을 계약위반이라며 협찬을 포기하자 외주제작사는 제작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종편채널 방송 시작 2개월 만에 이 같은 방법으로 제작을 그만둔 프로그램이 22개에 이른다고 한다. 어떤 제작사의 경우는 또 다른 어처구니없는 통보를 받기도 했다. 제작사가 제출한 기획안이 채택돼 프로그램을 제작해왔는데 이제 자체 제작하겠다고 통보한 것이다.

계약서 없이 말로 제작비를 약속하고 제작에 들어갔다가 일방적으로 낮춘 제작비를 받아야 했던 제작사도 한 두군데가 아니다. 어떤 제작사 대표는 이같은 종편의 외주제작사에 대한 행위를 3류 깡패들이 하는 짓과 비슷하다고 했다. 글로벌 미디어 그룹 탄생 등의 화려한 수사와 함께 출범한 종편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다.

여러 가지 여건으로 보아 한 두 개여야 할 종편이 4개나 출현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방송환경의 교란과 파괴를 걱정했다. 너무 많은 특혜가 종편채널에 주어졌다. 채널 배정에는 지상파 방송 대접을, 그것도 의무송신을 하는 공영방송 대접을, 광고의 직접 영업이나 중간 광고와 광고 총량제 허용 등 규제 완화나 면제에는 일반방송채널사업자 대접을 하는 특혜를 주었다.

이런 특혜는 다른 미디어에도 영향을 주어 ‘바닥을 향한 경쟁’, ‘하향 평준화’ 등으로 이른바 미디어 생태계를 파괴할 것이라는 걱정이 많았다. 그런데 이러한 걱정이 오히려 가장 긍정적인 효과가 날 것이란 외주제작 세계에서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종편채널은 우리의 외주제작산업을 크게 육성할 것이라고 했다. 외주제작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종편들이 출범함으로써 외주제작산업이 활성화되고 콘텐츠 제작력이 향상된다는 명분이었다. 그런데 가장 희망을 얘기해야 할 외주제작 세계에서 절망스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 남성우 언론인권센터 이사장
어느 지상파 방송사는 금년도 외주제작비를 줄인다고 한다. 금년 예상 수익이 감소할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지상파 제작비의 80%에 해당하는 종편채널의 외주제작비가 삭감의 빌미가 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열악한 외주제작산업이 종편채널의 출범으로 더욱 어려워져 버린 것이다.

희망이 절망이 돼버린 이러한 현상에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가. 무책임하게 네 개씩이나 종편채널을 출범시킨 사람들의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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