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의 눈] 우직하고 투박한 꿈이 담긴 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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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의 눈] 우직하고 투박한 꿈이 담긴 깃발
  • 송현욱 KBS 드라마 PD
  • 승인 2012.02.29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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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현욱 KBS 드라마 PD

“지난 수십 년간 수많은 사람들이 이 깃발에 셀 수 없는 꿈을 담아왔음을 나는 안다. 바로 평화와 공존의 꿈! 이 모든 평화와 공존을 위협하는 폭력, 그 모든 폭력에 강력히 저항하며 나는 절대 이 깃발을 내릴 수가 없다.”(드라마 〈한반도〉 4화)

극중 서명준 박사 역의 황정민이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외치는 대사다. 석유를 대체하는 제 3의 자원개발을 위한 남북합작 프로젝트, 그 핵심기지가 북한 군부 쿠데타 세력에 의해 존폐위기에 처하자 그는 보기에도 아찔한 기지 헬기 착륙장에 올라가 한반도기를 꺼내며 소박하지만 그 무엇보다 강력한 저항을 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맛보는 충격이었다. 북한의 저격수들이 방아쇠를 당기려는 절체절명의 순간, 방송사 헬기가 기지상공을 돌며 생중계를 하는 바로 그 순간, 주인공 서명준은 품속에서 피 묻은 깃발 하나를 꺼내 온몸으로 흔들었다. 근 미래 가상공간을 다루던 드라마가 민족분단의 냉혹한 현실에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우리에게 잊혀졌던 한반도기 하나로.

영화 〈도가니〉, 〈부러진 화살〉은 새로운 문화현상을 만들었다. 현실을 반영한 영화가 다시 현실을 변화시키는 기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도가니〉로 인해 광주 인화학교는 폐쇄됐고, 〈부러진 화살〉에 사법부가 들썩이고 있다. 오락으로만 치부되던 영화 한 편에 내놓으라하는 지식인들과 논객들이 참여해 열띤 지지와 논쟁을 벌인다. 돈 안 될 것 같은 영화 한편을 만드는 용기와 신념이 세상을 바꾸고 있다.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부럽기만 하다.

1991년 노태우 정권이 범죄와의 전쟁에 열을 올릴 무렵 〈여명의 눈동자〉는 친일 반민족 세력과의 힘겨운 싸움을 했다. 김일성 사후 조문파동으로 ‘빨갱이’ 색출 광풍이 불던 1995년, 〈모래시계〉는 5·18 학살세력에 대한 전면전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해 쿠데타 세력의 수장들은 체포됐다. 한국인이 뽑는 최고의 드라마 두 편은 그렇게 엄혹한 시절에 탄생했다.

김재철 MBC 사장은 〈해를 품은 달〉과 〈빛과 그림자〉가 시청률 고공행진으로 효자 역할을 하고 있다며 이 중요한 시기에 파업을 하는 ‘철없는’ 노조원들을 비난했다. 한류의 선두에서 막대한 수익을 창출하는 드라마는 방송사의 생존여부를 결정짓는 공룡 콘텐츠가 됐다. 뉴스와 교양·예능이 불방과 파행을 거듭해도 드라마 공장은 멈추는 일이 없다. 아니 멈출 수 없다. 드라마는 정치와 이데올로기, 정의와 신념의 상위 개념에 있는 ‘돈’을 벌어오는 최고의 히트 상품이기 때문이다. 〈PD수첩〉이, 〈추적60분〉이 부당한 억압에 맞서 처절한 싸움을 벌이는 동안 드라마는 승승장구하며 한류의 중심이 됐다. 이제 드라마가 동료들의 희생에 보답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 송현욱 KBS 드라마 PD

방송 사상 초유의 사태라는 MBC, KBS, YTN 동시파업이 실현될 전망이다. 지금 추세라면 4·11 총선은 주요 방송사가 파업한 가운데 치러지는 최초의 총선으로 기록될 것이다. 철학자 강신주 박사가 MBC 파업 현장에서 한 말이 명치를 때린다. “여러분 지금까지 잘 먹고 잘 사셨죠. 부모님 잘 살죠. 여러분이 바로잡혀야 말 못하는 사람의 입이 열립니다. 다른 이나 후손을 위해 뭘 하고 죽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상·언론 자유의 꿈! 이 모든 꿈을 위협하는 폭력, 그 모든 폭력에 강력히 저항하며 나는 절대 이 깃발을 내릴 수가 없다. 총구 앞에서도 당당한 결기가 필요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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