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듀서처럼 뭔가를 만들어 내야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게 상상력은 생명과도 같다. 그런데 상상력은 마치 호르몬처럼 줄어들기도 하고 고갈되기도 한다. 그럴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상상력이 넘치는 다른 창작물을 접하는 일이다. 호르몬 주사를 맞듯이 말이다. 다양한 각도에서 상상력의 힘을 보여주는 소설 몇 권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단, 지면 관계상 국내소설에 한정했다. 약발 떨어지신 PD님들, 한 대씩 맞아보세요.
내 이럴 줄 알았지. 단편집 <퀴르발 남작의 성>을 읽었을 때, 이 작가 뭔가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의 첫 장편소설 <일곱 개의 고양이 눈>은 소설의 본령이랄 수 있는 ‘이야기’에 접근하는 방식이 독특하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A라는 이야기가 B라는 이야기를 낳고 B는 C로 이어지고 C는 D로, D는 다시 A로 연결된다. 어렵고 복잡한 방식일 수도 있으나 글을 주무르는 솜씨가 워낙 정교하고 현란하여 읽는 재미가 있다.
어쩌면 내가 지향하는 ‘잘 읽히는 소설쓰기’와 정반대의 지점에 있는 소설이기도 하나, 그 기발함에 감탄하고 질투하며 읽었다.
# 고래 - 천명관
이 소설 한편으로 천명관은 작가로서의 브랜드를 획득했다. <고래>의 서사는 제목만큼이나 거대하다. 무척 긴 소설인데도 장황하거나 맥이 빠지지 않는다.
이야기 구석구석에도 상상력이 넘치지만 내가 주목한 천명관의 상상력은 이 소설이 우리 현대사의 특정한 지역과 장소에서 모두 비켜나 있다는 점이다. 몇몇 구절에서 대략 어느 때 이야기인가보다 짐작은 해볼 수 있으나 작가는 시대와 지역의 배경에 조금도 기대지 않고, 오직 ‘글빨’로만 작품을 지탱해낸다.
작가의 신작 <나의 삼촌 브루스 리>를 사놓고 못 읽고 있다. 혹 <고래>만 못할까봐. 데뷔작이 너무 뛰어난 것도 작가에게는 불행일 지도 모른다. 나는 얼마나 다행인가.
#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 듀나
굳이 ‘장르 소설’이라는 말을 쓴다면, 우리나라는 미국이나 일본에 비해 장르 소설 작가들이 턱없이 적다. 본격 문학과 장르 문학의 경계는 무척 애매해서 애정남도 쉽게 정의하지 못하겠지만 장르문학 작가임을 자처하는 이가 드문 것만은 사실이다.
근성있게 SF 소설을 써내는 듀나 같은 소설가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초대박 드라마 <해를 품은 달>역시 궁중 로맨스 작가 정은궐의 책에서 잉태되었으니.
# 싱크홀 - 이재익
내가 쓴 책이다. 내 책을 내가 소개하면 안 되나? 이런 장르의 국내 소설이 거의 없다시피 해서 굳이 이 책을 소개한다면 변명처럼 들리려나?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가 태어난 스토리를 영화적으로 구성하고 소설로 옮겨 놓은 책이다. 영화화를 의도하고 쓴 작품인데 다행히 의도대로 금방 판권계약이 이루어졌고 현재 영화로 제작 중이다. 내년 여름쯤 개봉할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