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언론을 닮은 어느 영국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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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영국= 장정훈 통신원

그를 만났을 때 나는 팔 다리가 잘린 채 차디찬 겨울 들판에 서 있는 대한민국 언론인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2011년 2월 7일, 그는 6명의 미군과 6명의 아프가니스탄 정부군으로 구성된 정찰팀을 따라 부대를 나섰다. 상사르(Sangsar). 그곳은 ‘어둠의 심장’으로 불릴 만큼 아프가니스탄에서도 아주 위험한 시골마을이다. 탈레반의 창설자 중 한 명인 물라 오마르(Mullah Omar)의 모스크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가 비교적 안전해 보이는 평지에 다다라 한 미군 병사와 이야기를 나누려 몸을 돌렸을 때 운명의 순간은 찾아왔다. 오른쪽 발에 무언가 밟히는 느낌이 드는가 싶더니 뜨겁고 하얀 광채가 무거운 정적과 함께 그의 주변을 덮친 것이다.

‘찰나’에 가까운 순간이었지만 그에게는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고 선명하게 느껴졌다. 정찰대원들이 달려와 응급조치를 취하는 동안에도 그는 의식을 잃지 않았다. 뼈를 드러내며 찢겨진 팔과, 사라져 버린 다리가 보였다. 누군가는 그의 의식을 붙잡으려 담배를 물려주고 말을 붙였고, 누군가는 지혈을 위해 진땀을 빼고 있었다.

▲ 영국 사진작가 질스 둘리(Giles Duley)가 직접 촬영한 자신의 모습
그는 죽음의 그림자가 성큼 성큼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그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의식이 살아 있던 그는 정찰대원들에게 카메라 장비를 잘 챙겨줄 것을 당부했다. 그리고 블랙호크에 실려 호송되는 내내 소리쳤다. “난 여기서 죽지 않아!”  

그는 폐와 콩팥, 두 팔과 두 다리에 걸쳐 광범위한 손상을 입었다. 산소 호흡기에 목숨을 의지해야 할 정도로 절망적이었다. 하지만 그도, 의료진도 치료를 포기하지 않았다. 수십 차례에 걸친 수술 끝에 그는 기적적으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왼쪽 팔과 두 다리는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그는 왜 전쟁터로 갔을까? 그는 독학으로 사진을 배웠지만 전도가 유망한 패션·연예전문 사진작가였다. <GQ>와 <에스콰이어>, <보그> 등의 유명 잡지에서 사진을 찍었고, 머라이어 캐리나 마릴린 멘슨, 레니 크라비츠 등과 같은 월드 스타를 상대로 작업을 했다. 큰 상도 받았다. 그야말로 상업 사진작가로서 탄탄대로였다. 그러던 그에게 변화의 순간이 찾아 왔다.

런던 중심의 한 유명 호텔에서 빅브라더 스타를 촬영하면서 그 스타의 가슴을 노출시키느냐 마느냐를 놓고 동료와 시비가 붙었다. 어느 순간 그는 깊은 회의에 빠졌고 그 자리에서 카메라를 집어 던졌다. 그 후 얼마간 그는 사진기를 들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이 사진을 하는 이유를 성찰하는 시간을 가졌다. 성찰은 그로 하여금 “사진은 후세를 위한 역사의 기록”이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했다.

상업 사진계를 떠나고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그가 한 자선단체에 합류해 찾아간 곳은 병원도 약도 없는 방글라데시의 난민촌이였다. 그가 카메라를 꺼내자 셀 수 없이 많은 환자들이 그를 찾아 왔다. 그는 당황했다. 의사도 아닌 자신이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말했다 “난 의사가 아닙니다. 난 당신들을 도울 수 없어요.” 그러자 한 노인이 말했다 “알아요. 하지만 당신은 여기, 우리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세상에 알릴 수 있잖아요.”

그는 방글라데시뿐 아니라, 아프가니스탄, 수단, 앙골라, 우크라이나 등 위험 지역을 찾아다니며 소외된 사람들의 모습을 열정적으로 담았다.

필자가 그를 만난 건 영국촬영감독협회(GTC) 주최로 열린 ‘위험지역 취재’에 대한 세미나에서였다. 그는 그날 초청 강사로 나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 했다. 담담했다. 곧잘 농담도 섞었다. 사지 중에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한 쪽 팔 뿐인 그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저는 비록 팔과 다리를 잃었지만 여전히 예전의 저로 살아 있습니다. 저의 프로젝트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남들이 가지 않는 곳, 주목받지 못하는 곳, 외면 받는 곳을 찾아 갈 겁니다. 이제 그곳에 사람들은 제 모습을 보고 동질감을 느낄 겁니다. 자신들과 같아진 나의 모습을 보고 친근해 하겠죠. 오른손이 남아 있기 때문에 아직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왼손에 카메라를 고정시키는 장치를 고안 중에 있습니다. 이제 몸뚱이의 반은 인간, 반은 카메라가 되는 거죠.”

▲ 영국=장정훈 통신원 / KBNe-UK 대표
그의 이름은 질스 둘리(Giles Duley). 올해 나이 40살이다. 그는 프리랜서다. 소속사가 없는 그는 비싼 보험료를 감당할 경제력이 없다. 그래서 보험도 없이 전쟁터를 누비고 있다. 영국에 ‘전국민 의료보험 (NHS)’시스템이 없었다면 그는 변변한 치료도 받지 못하고 죽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올해 다시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우고 있다. 세상에 존재를 드러내지 못해 그를 기다릴 약자들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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