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행의 편지] ‘미래 권력’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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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수로 십 년도 넘은 일입니다. DJ정부 후반기였습니다. 장상 이화여대 총장이 국무총리에 지명되었다가 위장전입과 부동산 투기 논란으로 낙마한 일을 기억하실 겁니다. 이 과정을 취재하면서 박근혜 의원을 처음으로 인터뷰한 적이 있습니다.

박근혜. 늘 그렇듯 그녀는, 사안에 대해 명쾌한 인식을 갖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도 못했고, 현안에 대해 분명한 정치적 입장을 보여주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인터뷰를 하고도 막상 쓸 내용이 별로 없어서 고심했던 기억이 납니다. ‘수첩 공주’라는 별명이 생긴 이유도 아마 그런 캐릭터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런 그녀가 빈사상태의 한나라당을 거푸 구해내며 ‘선거의 여왕’임을 다시 확인시켰고, 이제 ‘박근혜 대세론’은 그저 순풍을 만난 듯 해 보입니다. 총선이후 이명박 정부 잔여임기는 무의미해졌습니다. 사실상 대한민국은 정치적으로 ‘미래 권력’ 박근혜 의원이 통치하는 상황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생각해 봅니다. 박근혜 대통령.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겁니다. 심하게는 3대째 왕조처럼 세습하는 우리 동족이 있고, 최고 혈맹이자 우방이고, 그 나라에서의 일어나는 일이라는 이유로 우리가 많은 것들을 ‘당위’나 ‘모범’으로 여겨버리는 미국이라는 나라에서도, 아버지와 아들이 대통령을 하고, 남편과 아내가 시차를 두고 대선후보가 되는 시대니까요.

박근혜 의원 또한 이들 못지않은 호조건(?)을 가졌으니 ‘미래 권력’에만 머물지 않고 ‘현재 권력’화 할 가능성은 늘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의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은 절대왕권에 버금가는 권력을 누렸으며, 수많은 부정적 유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살아 있는 신화의 주인공이니 말입니다. 그녀에게 아버지는 굴레이자 축복인 셈입니다. 그녀 스스로가 인간으로 어쩔 수 없는 천륜이기도 합니다. 지금 그녀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아직 다 확인할 길은 없지만, 지금 그녀의 정치적 자산도 100% 아버지로부터 온 것이라고 보아야합니다. 그것을 부정하면 패륜일 수밖에 없습니다. ‘미래 권력’에 짙게 드리운 ‘과거 권력’의 어두운 그림잡니다.

개인적으로 전근대적 행태라고 생각하지만, 혈연 혹은 인척관계에 있는 자들끼리 권력을 이어갈 때 그것이 봉건적이지 않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절차적 정당성 이상의 새로운 가치와 시대정신을 담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박정희 대통령의 딸 박근혜 의원에게는 어떤 미래가 있을까?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대신 제 머릿속에는 ‘유력 주자’ 박근혜와 결코 분리 되지 않는 두 개의 장면이 있습니다. 2005년 12월 사립학교법 개정안에 반대해 한나라당 의원들을 이끌고 장외투쟁을 하던 모습이 하나이고, 2009년 7월 한나라당이 언론악법을 날치기로 통과시키던 때 안상수 원내대표실에서 만족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장면이 또 하나입니다.

온갖 불법과 비리의 ‘도가니’인 종교·족벌사학의 폐쇄적 운영을 개혁하기 위한 입법을 목숨 걸고 막고, 조중동 등 족벌신문사들에게 방송시장 진입의 길을 터줌으로써 이 땅의 언론을 더욱 황폐화시키는데 앞장선 ‘친박계’의 보스 박근혜 의원. 저는 그녀의 선택에서 국민을 설득할 어떠한 미래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4대강 사업, 쌍용차 강제 진압과 연쇄 죽음, 강정 해군기지, 민간인 불법 사찰, 언론장악 등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 이근행 전 언론노조 MBC본부 위원장
그래서 그녀를 인터뷰하고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오로지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건, 인터뷰에 응하기 위해 그녀가 자리하고 앉은 소파 뒤에 크게 걸려 있던, 어둡고, 커다란, 초상입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 그녀의 아버지입니다. 박근혜 대세론을 말하는 지금 모두에게 던지고 싶은 질문. 그녀는 미래입니까, 과거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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