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론에서는 파업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30년 가까이 방송현장에 몸담았던 사람으로서 그동안 파업이 있을 때마다 내가 취했던 입장을 생각해보면 이번 파업에 대해 무언가 얘기를 하기가 쉽지 않았다.

현장에 있을 때 여러 차례 파업이 있었다. 행복한 세대인지 불행한 세대인지 그때마다 나는 조합원이 아닌 간부였다. 파업이 하루라도 빨리 끝나기를 바라거나 함께 일하던 후배들이 한 사람이라도 파업에 덜 참여하기를 바랐다. 어떻게든 방송에 차질이 없도록 하는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 생각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파업이 끝난 후 후배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었다.

그리고 바람이 하나 더 있었다. 파업에서 얻은 것이 있든 없든 돌아올 때는 활기를 잃지 말기를 바랐다. 활기를 잃은 방송현장이 어떠했는가를 경험한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오늘의 파업을 보면서 1990년 이른바 ‘KBS 4월 투쟁’이 떠오른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제작거부, 파업이 있었지만 당시가 가장 생각나는 것은 그 후유증 때문이다. 5공시대의 부끄러운 방송을 반성하면서 겨우 싹트기 시작한 ‘방송 민주화’라는 소중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 36일이라는 긴 기간의 제작거부 투쟁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런 소득도, 다짐도 없이 끝난 투쟁의 후유증은 컸다. 가장 심각한 것은 제작현장을 짓누르는 무력감이었다. 제작현장은 활기를 잃었다. 시청자들과 호흡하고 소통하기 위해 꿈꾸고 상상해야 할 제작현장에 무거운 침묵이 계속됐다.

이 기간 동안 가장 피해를 본 것은 시청자다. 당연히 양질의 프로그램 서비스를 받았어야 할 시청자는 무기력에 빠진 제작자들이 만든 프로그램을 봐야 했다.

재방이 아닌 <무한도전>이 보고 싶다. 제대로 된 <1박 2일>이 보고 싶다. 많은 시청자들의 바람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 프로그램을 만드는 PD들은 파업 중이다. <무한도전> 담당 PD는 ‘가슴이 울어서’ 파업에 참여한다고 했다. 한 예능PD는 ‘쪽팔려서, 부끄러워서’ 파업에 참여한다고 했다.

왜 PD의 가슴이 우는가, 무엇이 PD를 부끄럽게 하는가. 이 절박한 질문에 누군가가 대답을 해야 한다. 제대로 된 프로그램을 기다리는 시청자를 위해 대답을 해야 한다. 바로 방송사 사장들이 내놓아야 할 대답이다. 퇴진을 요구받고 있는 방송사 사장들은 최소한 이 질문에 당연히 답을 하고 버텨야 한다.

이번 파업은 방송은 어때야 하는지, 특히 지상파 공영방송은 어때야 하는지 방송에 관한 본질적인 질문을 하고 있다. 시청자의 욕구와 목소리를 뉴스와 프로그램에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다는 반성을 넘어 제작자들을 부끄러워 울게 만든 만신창이가 된 제작현장에서는 더 이상 프로그램다운 프로그램을 만들 수 없음을 호소하고 있다.

그런데 답이 없다. 답을 해야 할 사람들이 답을 하지 않거나 엉뚱한 대답을 하고 있다. 파업은 방송에 관한 본질적 질문을 던진 것인데 해고, 소송, 압류 등으로 해결하려 한다.

국민인 시청자가 보고 싶은 프로그램을 못 보는데 대통령은 ‘방송사 집안 일’이라 하고 방송통신위원장은 ‘무능한 내가 뭘 하겠느냐’라고 했다고 한다. 방송에 대해 그리고 문화에 대해 얼마나 저급한 수준의 안목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차라리 ‘공정성에 문제가 없다’, ‘제작현장의 자율성은 충분히 보장되고 있다’고 강변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그렇지 않은 것을 보면 이 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방송의 공정성이 훼손되고 제작의 자율성이 위축되었음을 부인할 수가 없는 모양이다. 생각해보면 이번 같이 방송의 공정성, 자율성 문제로 파업까지 간 경우가 90년대 중반 이후로는 없었다, 지금의 방송환경이 얼마나 고약해졌는가를 미루어 알 수 있다.

100일, 50일이 넘어가도 파업의 전열은 흐트러질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해결책을 내놓아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외면하거나 오히려 파업을 부추기는 방향으로 대응을 하고 있다. 해결의 출구를 찾기가 어려워 보인다. 앞으로도 상당 기간을 시청자들은 옛날에 봤던 프로그램을 또 보거나 임시로 때우는 프로그램을 봐야 한다.

파업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을 빨리 제작현장으로 오게 하라. 설득을 하든, 대안을 제시하든 그러나 그들이 활기를 잃지 않고 오게 해야 한다.

파업 중인 후배들에게 이 한마디를 하고 싶다. 행여 아무런 소득 없이 파업을 접어야 하는 상황이 오더라도 의기소침하지 말라고. 잃어버린 활기를 되찾는 데는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린다. 
             

저작권자 © PD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