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행의 편지] 절로 자란 나무가 더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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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나무를 보게 됩니다. 꽃보다, 때론 사람보다 훨씬 좋습니다. 늘 그 자리에 있어서 좋습니다. 이 험하고 요란한 시기를 살아가면서, 위안을 주는 몇 안 되는 존재인 까닭에 고맙기도 합니다. 제가 세 들어 사는 오래된 아파트에 줄지어 선 수목은 얼마나 큰 행복인지 모릅니다. 이 삭막한 도시의 콘크리트 성채 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힘겹게 버텨 온 시간을 온전히 자신의 몸피로 바꿔 놓은 이 나무들에게, 삶이 힘들다, 차마 말할 수도 없습니다.

지난 주말에는 고향 선산(先山)에 다녀왔습니다. 이젠 유년(幼年)의 산길도 다 막혀 버리고, 조림을 하지 않은 산에는 소나무뿐만 아니라 온갖 잡목들이 뒤섞여 무성했습니다. 땔감을 줍고, 놀이를 하고, 나물을 뜯고, 열매를 따던 산. 때론 매를 피해 숨기도 했던 다복솔. 그 기억들이야 며칠 전의 일처럼 선연했지만, 그 시절의 풍경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대신, 사람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자리에서 이름을 알 수 없는 나무들만이 저마다의 푸른 시간을 살아내고 있었습니다. 참 고마운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산일을 다 끝내고 내려오려는 참에 집사람이 휴대전화로 나무 한그루를 찍습니다. 대략 20미터 남짓 수직으로 자란 노간주나무입니다. 노간주나무는 주로 소의 코뚜레를 꿰는데 쓰는 나무인데 누가 일부러 심거나 하지 않고, 심을 수도 없는, 그저 야산에 자생하는 나무입니다.

집사람은 하늘을 향해 창(槍)처럼 수직으로 자란 이 나무가 왠지 경외심을 준다며, 누가 여기다 심고 가꾸었느냐, 묻습니다. 저도 다시 그 나무를 보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본, 가장 큰 노간주나무입니다. 수직의 자세 또한 상당한 느낌을 줍니다. 나중에 찍힌 사진을 보니 한 앵글에 들어오지 않아서 나무는 밑둥치에서 절반가량만 찍혔습니다.

집사람은 ‘이 나무를 누가 심었느냐’고 물었지만, 사실 그 나무는 우리 일가(一家) 중 누구도 심지 않았습니다. 가꾸지도 않았습니다. 거름 한 줌 준 적이 없습니다. 이 나무는 그저 어느 날 우연히 바람에 실려와, 그 자리에 떨어져,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렸을 뿐입니다. 그리곤 거름지지도 않은 황토비탈에서 비바람 눈보라를 맞으며 묵묵히 시간을 보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시 그리 잘 자라지도 않는 이 나무는 지금 놀라운 높이와 놀라운 자세로 무덤가에 우뚝 서 있습니다.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돌보지 않는 나무가 더 아름답다’라고 말입니다. 나무와 달리 사람은 걱정이 많습니다. 늘 보살피고 가르치고 훈계하며 자식을 키웁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실패하고 말 것이라는 걱정에 평생 전전긍긍합니다. 직장생활에서도 사회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버려 두면 잘못될 거라는 사명감이 상호간에 수시로 작동합니다. 늘 비판하고 견인하려 애쓰고, 그래서 수시로 충돌도 발생합니다. 함께 무엇을 향해 싸워야 할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애정일 수도 있고 열정일 수도 있지만, 자칫 믿음이 깨지고 상처가 남기 십상입니다.

저는, 저 산의 나무처럼, 사람에게도 저마다 한 그루의 나무가 있어서 절로 자라기도 한다고 생각합니다. 타인이 옮겨 심을 수도 없는 나무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돌보지 않더라도 잘 자랄 것이라고 믿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무에 대한 믿음입니다. 인간에 대한 믿음입니다.   

▲ 이근행 전 언론노조 MBC본부 위원장
자신을 확신하지 못하는 딸아이에게 가끔 말해 왔습니다. 꽃이 피는 건 볼 수 있어도, 나무가 자라는 건 보이지 않는다. 순간에 화려하지 않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늘 높이 자라서 나무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푸른 시간, 우리는 저마다의 자리에서 한 그루 나무입니다. 언제나 그 자리여서 나무이고, 화려하지 않아서 나무입니다. 그 나무와 나무들이 큰 숲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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