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표절처벌법 제정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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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표절처벌법 제정하자
  • 정운현 ‘진실의 길’ 편집장
  • 승인 2012.05.28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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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현 ‘진실의 길’ 편집장


80년대 중후반의 일이다. 당시 모 방송사 PD로 근무하던 한 선배는 그 때만 해도 흔치 않아 남들의 부러움을 샀던 외국출장에 오히려 짜증을 내곤 했다. 해외출장이 출장이 아니라 도둑질하러 가는 거라고 했다. 얘기를 들어보니 캐나다나 일본, 미국 출장을 가서 현지 취재를 하는 게 아니었다.

비싼 호텔에 방을 잡아놓고는 일주일이나 열흘 내내 그곳 텔레비전만 보고 온다고 했다. 말하자면 그곳 텔레비전 프로그램 가운데 좋은 게 있으면 베껴오는 게 출장 목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무렵 신문의 방송비평 란에는 ‘모 방송사 프로그램이 어느 나라 어떤 프로그램를 베꼈네’ 하는 식의 비판기사가 더러 나곤 했다.

최근 전여옥 의원의 <일본은 없다> 표절사건이 한국사회를 한 바탕 뒤흔들었다. 40대 이상의 중년세대 가운데는 그 책을 기억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제목도 도발적인데다 1993년에 출간된 이후 근 10년 만에 100만부 넘게 팔렸다고 하닌 그럴 만도 하다. 그런데 그 책이 남의 아이디어를 베껴(혹은 훔쳐) 쓴, 즉 장물로 만든 책이라고 하면 독자들은 어떤 느낌이 들까? 책은 단순히 지식만 습득하는 게 아니라 독서를 통해 교양과 지성도 함양하는 법이거늘. 전 의원의 표절을 인정하는 대법원 판결 기사의 댓글 가운데는 <일본은 없다>를 태워버리고 싶다는 독자도 있었는데 아마 그런 독자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전여옥 표절사건은 최근 한국에서 발생한 각종 표절사건의 정점(頂点)이었을 뿐 우리사회에는 표절이 만연돼 있다. 도서문화가 주류를 이루던 시절에는 저작(著作)이 창작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대부분의 표절은 책이나 논문 베끼기가 주된 양상이었다. 그러나 창작문화가 다양화, 세분화 된 요즘은 그 양태가 천태만상이다. 다시 말해 사진 한 장, 그림 한 점, 노래의 곡조 한 마디도 창작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현행 저작권법에 따르면, 저작물은 인간의 사상 또는 감정을 표현한 창작물이며(2조), 그 종류는 소설·시·논문·강연·연설·각본과 그밖의 어문 저작물, 음악 저작물, 연극 및 무용·무언극과 그 밖의 연극 저작물, 회화·서예·조각·판화·공예·응용미술 저작물과 그밖의 미술 저작물, 건축물·건축을 위한 모형 및 설계도서와 그밖의 건축 저작물, 사진 저작물, 영상 저작물, 지도·도표·설계도·약도·모형과 그밖의 도형 저작물, 컴퓨터프로그램 저작물 등 실로 다양하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 속에서 이를 사회적·제도적으로 보호해주는 장치는 미약한 편이다. 학술논문의 경우 각 대학이나 학회, 또 교육과학기술부에서 ‘논문표절 가이드라인’ 을 만들어 운용하고 있다. 또 영화와 음악 분야의 경우 문화체육관광부에서 ‘표절방지 가이드라인’을 제정해 적용하고 있지만 표절논란은 끊이지 않고 있다. 현행 법령상 이를 규제할 근거는 ‘저작권법’ 하나뿐이다. 저작권법은 공익적 목적이 아닌 경우에는 출처를 명시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또 출처 명시 규정을 위반한 자는 5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138조)고 돼 있다.

‘표절(剽竊)’을 다른 말로 표적(剽賊), 도작(盜作)이라고도 하는 걸로 봐 표절은 엄연한 ‘도둑질’이다. 그럼에도 한국인들이 표절을 우습게(?) 여기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형량이 그리 무겁지 않기 때문이다. 표절은 도둑질 중에서도 ‘고급 도둑질’에 속한다. 그렇다면 표절을 형법의 ‘절도죄’로 다룰 법도 하다. 형법의 절도죄(329조)는 ‘6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어 저작권법보다 엄한 편이다. 학위논문 등 무려 7편의 논문을 표절하고도 얼굴을 빳빳히 들고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하는 나라는 한국뿐이다.

지난 4.11 총선 기간에 있었던 일이다. 슈미트 팔(70) 헝가리 대통령이 갑작스레 사임했는데 그 이유는 논문 표절 때문이었다. 이 일로 박사학위를 박탈당한 슈미트 대통령은 4월 2일 헝가리 의회에서 “대통령은 국가의 통합을 대표한다. 불행히도 (나의 표절이)분열의 상징이 됐기 때문에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야 할 의무를 느낀다”며 사임 이유를 밝혔다.

그러나 한국에선 이런 일도 ‘남의 나라 얘기’일 뿐이다. 학술단체협의회로부터 논문 표절자로 공인된(?) 여야 국회의원 당선자 7명은 여전히 끄떡도 않고 있는데 오히려 ‘왜 나만 갖고 그러느냐’는 식이다. ‘표절공화국’에선 흔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표절처벌법’ 제정을 서둘러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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