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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주인이 전세 보증금을 올려달라고 했다. 자그마치 3500만원. 1000만원이라도 깎아주면 좋겠건만 씨알도 안 먹힌다. 생각해보겠다고 대답했지만 막막하다. 월급 못 받은 지 석 달. 앞으로 얼마나 더 빈손일지 모르니 대출을 더 받기도 어렵다. 남은 방법은 이사뿐이다.

객지생활 14년차. 집구하고 이사하는 데는 나도 잔뼈 깨나 굵다. 하지만 이번 이사는 유난히 어려웠다. 4년 전, 시세보다 싼 값에 지금 집을 얻었는데, 교통도 좋고 널찍해서 그동안 편하게 살았다. 헌데 이 집이 제값을 부르니 소위 ‘낮춰서’ 가야하는 형편. 가까운 데서 먼 데로, 큰 집에서 작은 집으로, 어디를 가도 불편이 따라온다.

‘그래, 돈 없으면 불편하게 살아야지 어쩔 수 있나. 좀 더 밖으로 나가자.’ 쉽게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도 않았다. 먼 곳으로 나왔음에도 집값은 만만찮았고, 애매한 보증금으로 구할 수 있는 집들은 어딘지 10% 부족했다. 그 와중에, 이사 가면 출퇴근이 너무 힘들다며 동생이 뒷북 분가를 주장, 나 혼자 살 집을 다시 알아봐야했다. 계약을 하려했더니 이번엔 어머니께서 분가를 반대, 또 원점에 서고 말았고, 천신만고 끝에 살만한 집을 찾았다 싶었더니 집주인 변심으로 계약이 불발됐다.

고단했다. 집을 보고 돌아오는 길이면, 석양을 받은 수많은 지붕들이 착잡하게 다가왔다. 하늘아래 이렇게 집이 많은데 내가 갈 곳은 없다는 통속적인 스토리. 마음은 점점 급해지고 머릿속은 복잡해져 판단에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그런 상태로 계약에 빨려 들어갔다.

무언가 불가항력이 나를 끄는 느낌이었다. ‘역에서 꽤 멀지만 이만한 집도 없다’ 싶은 집이 있었는데, 다음날 다시 보러갔더니 나 말고 계약을 하려는 이가 있었다. 결정을 미룰 수 없어 등 떠밀린 기분으로 도장을 찍고 나니, 내가 사는 집도 방금 나갔다며 전화가 왔다. 양쪽 세입자의 사정으로 이삿날도 절로 정해져버렸다.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지는 게 이 집이 맞긴 맞았나보다’ 하면서도 왠지 후회가 됐다. 너무 좁은 거 아닌가, 좀 더 돌아봤어야 되는 거 아닌가, 집 자체는 나빴지만 더 넓고 가까웠던 후보지 B를 택해야했던 거 아닌가, 무리를 해서라도 그냥 눌러 살 걸 그랬던가,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하필 이삿날도 주말에 월말에 손 없는 날이라 하여 비용이 만만찮았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이 점점 더 좋아 보여 이사 가기가 싫어졌고, 새 집에 과연 이 짐이 다 들어가기나 할지, 억지로 구겨 넣고 비좁게 어찌 살 것인지, 점점 비관적이 되었다. 이 모든 과정이 다 나의 고생수라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 김나형 MBC 라디오PD
그렇게 시간이 흘러 지난 주말. 심란한 마음으로 새 집의 치수를 재러갔다. 그런데…어라? 사이즈를 재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넓다. 미처 몰랐던 자투리 공간들도 있고, 도배며 장판도 믿을 수 없이 깨끗해서 이사 비용도 다시 확 줄었다. 밝고 깨끗하고 쓰임새가 좋은 집. 처음 봤을 때 느낀 이 집의 장점들이 그제야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고생수가 아니라, 무언가가 내게, 그 와중에 괜찮은 집을 구해 준 모양이었다.

 그래, 세상에 이유 없는 일이 어디 있던가. 조금 불편하고 조금 힘들면 좀 더 겸손해질 것이다. 쓰지도 않으면서 쌓아둔, 많은 묵은 짐을 정리하니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진다. 먼지 쌓인 책 50여권을 닦아 보냈더니, ‘○라딘’에서 10만원을 준단다. 쉽지만 어려운 말. 때로는 버려야 다시 채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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