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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윤경의 chat&책]

나무에 사람살이를 새겨 온 목판화가 이철수의 책, ‘웃는 마음’ 이 나왔다. 기다렸다는 듯 그와의 인터뷰를 위해 도시를 빠져나갔다. 주중에 고속도로를 달리는 기분은 꽤 짜릿하다. 빽빽한 도시의 시간을 뒤로하고 슬쩍 일탈을 한다는 기분도 들고 말이다.

차로 2시간 남짓. 그가 사는 충북 제천, 박달재 밑 평장골이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80년대 후반, 이곳에 정착해 농사를 지으며 자연과 사람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이철수 판화가. 그의 손길과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 농작물들이 꽤 튼실해 보인다. 집에 들어서자 마당 한 켠에 벌렁 드러누워 있는 진돗개 ‘탄’의 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들고 나는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낯선 이들이 찾아와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저 망중한을 즐길 뿐.

▲ ‘몽실언니’- 권정생 지음, 이철수 그림 ⓒ창작과 비평사
시원한 오미자차와 쑥떡으로 오감을 호강시키고 그의 작업실을 둘러본다. 나무에 새긴 그의 이야기가 여기저기에서 수런거린다. 그 중 눈에 띄는 얼굴이 보인다. 고 권정생 선생의 불후의 명작 ‘몽실 언니’의 주인공 몽실이다. 동글동글한 얼굴에 바짝 치켜 자른 머리, 동생 난남이를 업고 있는 모습이 오래 전 만났던 몽실이가 맞다.

막 판화를 찍고 색을 칠한 듯 정갈한 모습의 몽실이. 생각지 않았던 만남에 마음이 설렌다. 어찌된 영문인지 이철수 판화가에게 물었다. 얼마 전 출간 100만부를 돌파하면서 개정판이 새로 나오게 됐는데 초판부터 삽화를 그렸던 그가 개정 4판에 새롭게 몽실 언니를 그리게 됐다고 한다. 찬찬히 살펴보니 처음 몽실이보다 섬세하고 부드러워졌다. 인물의 동작이나 배경의 공간감, 옷의 주름이나 나뭇잎의 움직임에 이르기까지 이철수 판화가가 이 작품에 대해 얼마나 숙고하고 새롭고 풍부한 해석을 보여줬는지 느껴졌다.

‘몽실 언니’는 한국전쟁 전후를 배경으로 어린 몽실이가 부모를 잃고 동생 난남이를 키우며 겪는 고난과 성장을 그린 동화다. 해방과 한국전쟁, 극심한 이념 대립 등 우리 현대사의 굴곡을 온몸으로 겪은 작은 소녀의 이야기지만 처참한 가난 속에서도 인간다움을 잃지 않고 이웃과 세상을 감싸 안은 한 인간의 위대한 성장기이다. 1984년 처음 세상에 나온 이후 어린이 뿐 아니라 어른들도 몽실이를 사랑하게 만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30여 년에 걸쳐 100쇄를 펴내는 동안 필름이 낡아 인쇄가 불가한 이유로 개정판을 거듭 출간하는 이례적인 기록도 남긴 ‘몽실 언니’.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의 역사의 한가운데에서 이 땅의 수많은 보통 사람들이 겪은 일을 대신해 증언하고 있는 몽실이를 만들어 낸 권정생 선생은 한 인터뷰에서 “가난하게 살아도 저렇게 사는 것, 저 자체가 인생에서 아름다운 것 아닌가” 하는 마음으로 작품을 썼다고 고백했다.

30년 전, 몽실 언니를 만나 위로받고 용기를 얻었던 독자들은 어느 덧 중년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에겐 위로가 필요한 시대다. 그리고 일상의 폭력과 차별, 가난과 가족의 해체가 여전한 오늘날, 많은 세상을 살아내야 하는 어린 세대들에게도 난남이가 기도처럼 부른 ‘몽실 언니’가 어깨를 토닥여주고 손을 잡아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 송윤경 KBS <즐거운 책읽기> 작가
‘몽실 언니’ 에 이어 권정생 선생의 작품 ‘점득이네’ 도 이철수 판화가의 그림으로 조만간 다시 세상과 만난다고 한다. “이 세상 모든 폭력이 사라지지 않는 한, 우리는 누구나 불행한 삶을 살아야 할 것” 이라고 한 고 권정생 선생. 신문지상을 가득 메우는 안타까운 폭력사태를 보면서 그의 따뜻한 위로가 그리워지는 요즘 ‘몽실이’와 ‘점득이’가 조금이나마 위로와 용기와 희망을 전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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