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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 지난 5월 1일 <PD저널>에 ‘패배 이후’라는 칼럼을 쓴 이후, 통합진보당 상황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해 주는 문장이 있을까.

통합진보당 정파들은 정확히 ‘치킨게임’을 치르고 있다. 어느 쪽이든 탈당하면 망할 거라는 예측 때문에 당이 깨지진 않겠지만, 비극은 이 게임이 ‘미친 놈’이 이긴다는 사실(<PD저널> 2011년 11월 30일자 ‘미친놈과 바보의 게임’을 참조하시라)에 있다.

만일 두 집단이 냉정하다면 어느 한 쪽이 양보를 하는 것이 치킨게임의 균형인데 양 쪽은 6월말로 예정된 당대표 선거로 양보 집단을 결정할 요량이다. 다수결은 어떻게든 결론을 낸다는 점에서 민주주의 최후의 선택지라고 할 수 있지만 또한 민주주의의 여러 해법 중 가장 덜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문제는 다수결에 의한 양보가 진정한 통합으로 이어질 것이냐에 있고 더 큰 문제는 이런 해결이 땅에 떨어진 국민의 신뢰를 회복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는지 여부다. 어쩌면 통합진보당은, 발목을 매단 탄력 좋고 튼튼한 밧줄도 없이 100m쯤 더 떨어져야 하는 번지점프 중인지도 모른다.

영국의 정치학자 부체크(Boucek)는 최근 한 논문 ‘정파주의를 다시 생각한다’에서 정파주의를 세 가지로 분류했는데 ‘협력적 정파주의’, ‘경쟁적 정파주의’, 그리고 ‘퇴행적 정파주의’가 그것이다. 내 보기에 통합진보당의 각 집단은 ‘퇴행적 정파주의’에 빠져 있다. 이 정파주의 구도에서 각 집단은 당 전체의 가치보다 개별 집단의 이익을 실현하는 데 골몰해서 당의 공유자원을 파괴하며 당은 분열과 잠재적 붕괴 상태에 빠진다. 부체크는 1994년에 붕괴한 이탈리아 기독민주당의 70년대 행태를 대표적 사례로 들고 있다.

정파주의는 거의 모든 정당에서 언제나 나타나는 현상이며 집단 간 경쟁은 각 집단 내의 신뢰와 협동을 촉진하는 강력한 메커니즘이기도 하다. 더 큰 가치를 공유하면서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공동선을 향해 경쟁할 수 있다면 퇴행적인 정파주의도 어느 덧 협력적 정파주의로 승화할 수 있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집단 간 경쟁은 ‘집단 의견의 양극화’(선스타인), ‘집단 환상’(베너부)으로 이어지기 일쑤여서 선스타인은 자신의 관찰 결과에 ‘법칙’이라는 낙인마저 찍었다. 실제로 현재 통합진보당은 진보라는, 모두 추구한다고 공언한 전체 가치를 가차 없이 붕괴시키고 있는 중이다. 흔히 집단 간 경쟁은 상대에 대한 왜곡된 정보를 집단 내에 퍼뜨리고 상대의 의도에 관한 추측을 양산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특히 각 집단의 지도자나 지식인이 이런 왜곡을 방조하거나 적극적으로 이용할 때 상황은 더 심각해진다(게시판이나 SNS에 난무하는 추측과 동조 댓글들을 보라).

협력적 정파주의는 흔히 정당 창립기에 나타난다. 새로 추구할 가치에 합의하고 희망에 부풀어서 구체적 실천 방안이 쏟아지는 상황이다. 통합진보당 내외에서 ‘제 2의 창당’, ‘새로 나기’, 그리고 ‘진보 시즌 2’라는 구호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과연 새로 합의할 수 있는 가치, 전략은 무엇일까. 나는 현재 각 정파의 가치 자체부터 철저한 성찰을 통해 재탄생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주성’, ‘노동중심성’같은 가치가 바로 그러하다. 현실은 과거의 ‘자주 노선’으론 남북통일이나 동아시아의 평화체제를 이룰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동시에 과거의 ‘노동 중심성 노선’으론 평등 세상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반복해서 증명하고 있다. 세계의 대전환기에, 즉 진보가 대도약을 이룰 수 있는 절호의 기회에 이 무슨 시대착오란 말인가.

▲ 정태인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원장
가치의 다원성을 인정하고 상대의 의견을 존중하며 나아가서 자신의 의견을 기꺼이 바꿀 용의가 없다면 집단 간 경쟁이 협동으로 승화할 가능성 또한 사라진다.

현재야말로 리더십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각 집단의 리더가 아니라 당의 리더로서, 진보진영 전체의 리더로서 집단 간에 만연한 왜곡된 정보를 바로잡고 모두의 억울함을 풀어야 한다. 파괴된 국민의 신뢰야 말로 빨리 채워야 할 진보진영 모두의 공유자원이다. 과거 가치의 재해석, 새로운 가치에 대한 합의, 그리고 당내 (숙의) 민주주의야말로 추락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오솔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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