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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혜의 되감기] ‘시작은 키스’

키만 껑충 크고 존재감 제로인 스웨덴인 마르퀴스에게 지적이고 아름답고 흠잡을 데 없는 나탈리가 느닷없이 다가와 키스를 한다. 이게 대체 뭐지? 이후 마르퀴스의 마음에는 의문부호가 끝없이 솟아오르고 나탈리의 키스가 과연 그녀와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싶어 한다.

사실 나탈리는 마르퀴스가 자신에게 한 키스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물어오기 전까지는 그 자신, 마르퀴스에게 키스를 한 사실 조차 알지 못했을 정도로 정신이 나가있는 상황이었다. 왜냐하면… 아, 그녀에 대해 오해가 없도록 조금 더 소개를 해야겠다. 나탈리는 자신과 꼭 들어맞는 소울메이트 프랑소와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는데 지극히 평범했던 나날들 중 하루, 바로 그 날 조깅하러 나간 남편을 교통사고로 잃고 만다. 이후 나탈리의 얼굴은 무표정하게 변했고 나탈리의 일상의 색은 무채색이 되었으며 자신이 해야 할 일에만 몰두하는 사람이 되었는데 멍한 상태에서 생각에 잠겨있던 바로 그 순간 114호 문건 때문에 나탈리의 방에 들른 마르퀴스에게 아무 자각없이 키스를 해버린 것이다.

▲ 영화 ‘시작은 키스’
그런데 그 키스로 인해 두 사람 사이에는 갖가지 델리카한 일들이 벌어진다. 섬세하고 예민하게, 특별하고 선명하게 나탈리와 마르퀴스는 서로의 델리카한 부분들을 발견하고 델리카하게 서로에게 조금씩 빠져든다. 결국 나탈리를 사로잡은 것은 마르퀴스의 (남들이 알지 못하는) 지극히 델리카한 부분이며 마르퀴스는 그 델리카함으로 나탈리의 델리카한 부분에 가닿는다.

다비드 포앙키노스는 이 한없이 델리카해서 사랑스러운 소설을 쓰고 동생과 함께 직접 영화 연출까지 하고 있다. 워낙 델리카한 작품이라 영상의 대사로 담기에는 뚝뚝 건너뛰고 뭉뚱그려야 했던 부분들이 많지만 그럼으로 해서 영화는 또 다른 상큼함과 신선함을 준다. 어쩌면 다비드 포앙키노스는 자신의 소설의 델리카함을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과감하게 영화에 맞는 해석을 내놓았는지도 모르겠다.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가 의미하듯 텍스트는 시대와 상황, 기타 조건들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어야 하고 따라서 같은 작품이라해도 소설과 영화의 문법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해석의 접근으로 다가가야 하는 것인데 델리카한 이 작품 <시작은 키스>는 바로 그 점을 잘 살려낸 작품이다. <시작은 키스>의 원래 제목인 <la delicatesse>가 살아있는 영화랄까.

스웨덴판 <남과 여>를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저자의 말처럼 배우자와 사별하고 자신의 감정과 일상에 일정한 담을 쌓고 지내던 그녀 나탈리가 새롭게 다가오는 델리카한 그 마르퀴스와 다시 사랑에 빠지게 되는 순간까지 머뭇거리고 멈칫거리며 조금씩 조용히 마음을 열어가고 자신과 상대방을 들여다보는 일련의 델리카함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어쩌면 사랑에 빠지는 것 자체가 델리카한 것이다. 사랑은 한 사람의 마음만 달아올라서는 이루어질 수 없고 제 때 두 마음이 가닿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다. 두 사람의 마음이 동시에 조금씩 열려가는 것, 델리카하게 서로에게 정확하게 가닿는 것. 그것이 사랑인 것이다.

▲ 신지혜 CBS 아나운서/ <신지혜의 영화음악> 제작 및 진행
<시작은 키스>. 언뜻 원제와 동떨어진 제목 같지만 생각해보면 꽤 그럴듯한 제목이다. 나탈리와 마르퀴스의 사랑의 시작을 델리카하게 잘 전해주는 제목.

아아, 이 영화, 델리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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