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행의 편지] 또 하나 징한 ‘이 바닥’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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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행의 편지] 또 하나 징한 ‘이 바닥’ 이야기
  • 이근행
  • 승인 2012.07.26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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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행 전 언론노조 MBC본부 위원장

오월이었습니다. 공달이 들었다고, 녹음이 짙어 가는 산기슭마다 묘를 이장(移葬)을 하는 모습이 참 많이 눈에 띄었습니다. 듣기로는 화장터 시간을 예약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합니다. 제 고향 함평(咸平)은 참 무덤이 많습니다. 전라남도 함평은 경남 거창과 더불어 양민학살로 유명한 곳이지요.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겨울. 국군 11사단 20연대에 의해 군내 3개면에서 정부통계로는 524명, 실제로는 1500여명의 무고한 지역주민이 제 나라 군인에 의해 학살(虐殺)되었습니다.

제 어머니는 이웃들이 굴비 엮이듯 묶여 냇가 둑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총살당하던 당시를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십니다. 돌아가신 할머니는 마을 앞 논 가운데서 벌어진 복수극, 사람의 입을 벌리고 그 안으로 죽창을 찔러 넣던, 그 처참한 날들을 차마 끝까지 말씀하지 못하셨습니다. 그저 검불 같은 흰머리를 긁적이시며 고개만 절레절레 저으셨습니다. 기억은 그렇게 사람의 평생을 옥죄는 감옥이자 고통스런 상처였습니다. 어린 저는,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는 것인가, 이해할 수 없었고, 은하수가 흐르는 한 여름 밤에 마당 멍석에 누워 듣는 할머니와 어머니의 이야기는 마치 먼 행성(行星)의 일 같기도 했습니다. 진저리치던 비극은 시간이 지나 그렇듯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려서부터 수시로 듣던 ‘그 징허디 징헌 이야기’의 말미에 어머니도 할머니도 꼭 하시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다 이 바닥 놈들이였다. 이 바닥…. 죽이는 사람도, 죽임을 당하는 사람도, 다 서로 아는 사이였다는 뜻입니다.
시간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 기억과 지워지지 않는 상처의 근원은 다 ‘이 바닥’이라는 데 있습니다. 함께 품앗이를 하고 참거리를 나누어 먹던, 그렇게 식구나 다름없는 이들 사이에서 반복되었던 살육전. 그것을 직접 겪지 않은 제가 어찌 할머니와 어머니의 마음속을 짐작이나 하겠습니까?

지금 여의도 MBC에서는 170일 동안 치열하게 진행되었던 김재철 퇴진과 공정방송실현을 위한 파업투쟁이 일시 중단되자, 경영진에 의해 야비한 복수극과 낯 뜨거운 잔치가 동시에 벌어지고 있습니다. 김재철은 자신의 똘마니가 된 자들에게는 대대적인 승진과 보직으로 은전을 베푸는 대신, 파업투쟁에 참여했던 구성원들에게는 무차별적 징계와 피의 보복인사를 자행했습니다.

그 가운데는, 이미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고참 사원들도 참 많습니다. 20년 전 공정방송 투쟁을 하다가 해고를 당하고 구속을 당했던 이들도 있습니다. 후배들이 보기에, 오랫동안 푸른 수의(囚衣)를 입고 사진 속에 있던 이들입니다. 그들이 마치 그 사진 속을 걸어 나오기라도 한 듯 다시 싸웠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평생 일해 왔던 직종을 떠나야 했습니다. 기자가 산골짜기 산지기로 유배형을 받기도 하고, 프로그램을 제작했던 PD가 비제작부서 골방에 처박히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아침 저녁으로 수 십 km를 달려야 합니다. 인구 1500만의 서울을 가로질러 반대쪽 유배지에서 출근신고를 해야 합니다. ‘미래전략실’이니, ‘사회공헌센터’니, ‘용인 드라미아’니 하는 곳이, 다 나치의 수용소나 다름없는 곳입니다. 저는, 왜 반백(半白)의 당신들이 다시 노동조합에 가입하고 다시 싸우는가,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엄기영 사장이 강제 축출된 후 임명된 김재철 사장은 이른 바 ‘좌빨 척결’이라는 정권의 지시에 따라 무고한 MBC 구성원들을 양민학살 하듯 하루아침에 내몰고 끌어내렸습니다. 공정방송을 요구하는 노동조합 간부들과 기자회장 등 8명을 해고했고, 200명 넘는 사원들에게 중징계를 내렸습니다. 수많은 노동자들을 분신과 죽음으로 내몰았던 손배가압류도 서슴없이 저질렀습니다. 69명은 지금 도살장의 짐승처럼 대기발령 상태입니다.

사정이 이러니 모르긴 해도, 20년 전에도 보지 못했던 이 피비린내 나는 내부의 살육전을, 선배로서, 아니 인간으로서 더는 견딜 수 없었을 겁니다.

조직 내부의, 어머님과 할머님의 표현으로는 ‘이 바닥’ MBC의 학살극. 그것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 되었습니다. 이 싸움이 불원간(不遠間) 종결된다하더라고 우리를 평생 ‘진저리 치게’ 할 고통의 근원이 될 것입니다. 권력을 향한 저항, 낙하산 사장 퇴진 투쟁, 공정방송 실현 투쟁. 이 모든 건 공영방송MBC 안에서 지속적으로 있어 온 일입니다. 그러나 싸움에 따르는 희생을 기꺼이 감수하면서도 MBC 안에서는 자라지 않았던, 인간에 대한 적의(敵意)의 씨앗을 뿌린 건 김재철 사장과 그의 하수인들이 처음입니다. 인간이란 그런 것인가, 수없이 자문했지만 그들을 평생 용서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 이근행 전 언론노조 MBC본부 위원장
함께 일을 하고, 밥을 먹고, 웃고 놀던, 그런 시간은 사라졌습니다. 그 시절로 다시 돌아 갈 자신도 제겐 없습니다. 그것이 무섭습니다. 인간의 밑바닥을 보아버리고 만 자의, 슬프디 슬픈 ‘이 바닥’ 이야기입니다. 혹 시간이 흘러서 지금 제가 겪은 ‘이 바닥’의 일들이 하나의 이야기가 될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이 편지는 5월 초 무크지 <시인>에 썼던 글을 최근 상황을 보면서 일부 고쳐 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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