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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 잘봤어’라구요?
김정희<방송작가>

|contsmark0|3년전 한 정규다큐프로그램을 잠깐 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는 방송사에 얼굴을 내밀기가 ‘죽기보다 더 싫은’ 날이 있었다. 바로 내 프로그램이 방송된 그 다음날이다. 하지만 나는 별수 없이 그날도 방송사에 얼굴을 내밀어야 했다. 팀내 회의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contsmark1|회의란, 다름아닌 프로그램품평회다. 같이 일했던 pd와 이날만큼 동지의식을 강하게 느끼는 날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아침부터 만나 팀의 분위기를 살피며 심란한 마음으로 판결을 기다린다. 이윽고 회의시간, 사람들이 입을 열기 시작한다. 그것은 익숙해지는 데 상당한 인내와 훈련이 필요한, 매서운 비평시간이다. 이런 회의는 프로그램 제작과정에서도 두세번쯤 더 열린다. 그때마다 회의는 기본이 한시간, 길게는 두어시간씩 얘기가 계속된다.
|contsmark2|그 과정에서 ‘우리’가 만든 프로그램은 여지없이 해체되고 만다. 고민하지 않고 약삭빠르게 포장해놓았던 장치들, 어디선가 본 듯한 멋진 자료화면, 쓸데없는 반복, 상투적인 논리, 그리고 이번에도 버리지 못한 어떤 고집같은 것들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적인지 동료인지, 본대로 느낀대로 거침없이 얘기하는 얼굴들. 몇 년전만 해도 이렇게 시청률보다 더 무서운 것이 동료들의 질타와 감시였다. 그때만 해도 그런 일들은 하나의 통과의례처럼 여겨졌다. 그것은 당하는 연출자나 작가뿐만 아니라, 무섭게 비평을 가하는 동료에게도 보다 나은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불가피한 과정이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contsmark3|그런데 요즘은 대체적으로 회의의 양상이 좀 달라졌다. 대부분의 회의들이 작가까지 굳이 참석을 해야 되는 일도 없거니와, 회의석상에서 언제부턴가 칼날같던 pd들의 목소리도 자취를 감추었다. 요즘 아침회의의 분위기를 결정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그중 하나는 방송인의 아킬레스 건이라고 불리우는 그 ‘시청률’이라는 것이다. 시청률이 좋다고 하면 요즘은 웬지 동료들도 뽑았던 칼을 도로 집어넣는다. 그리고 침묵한다. 회의에 영향을 미치는 또다른 하나는 ‘윗사람의 반응’이다. 아무리 문제가 많은 프로그램도 윗사람이 좋다고 하면, 또다시 pd들은 입을 다문다. 이런 일들이 계속되면서 요즘은 후배의 프로그램에 대해서도 선배가 말하기를 꺼려하고, 후배도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간밤에는 ‘야, 저건 좀 이상하잖아’하며 고개를 갸우뚱하던 pd도 다음날 아침 동료에게는 웃는 얼굴로 ‘잘봤어’라는 인사로 침묵하는 게 보통이다.
|contsmark4|연출이 개인의 성역이 되어 높은 벽을 쌓고, pd가 고립되기 시작한 것이 이런 침묵 때문은 아닐까. 프로그램은 pd의 아이덴티티다. 그런데 요즘은 pd들끼리 공개석상에서 자기 프로나 동료의 프로그램에 대해 얘기하는 모습을 거의 볼 수 없다. 얼마전 한 방송사의 pd들이 자체적으로 시작했던 프로그램 모니터 모임이 몇회 가지 않아 무산된 사실도 이러한 세태를 입증해주고 있다. 이런 현실속에서는 옛날처럼 후배들이 선배들의 노하우를 배우고, 선배들이 후배들의 반짝이는 아이디어와 신선한 비평을 수용할 수 없다. 결과적으로는 pd 스스로, 자기 검증과 발전의 기회를 포기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contsmark5|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최소한 프로그램 제작여건을 서로 이해하는 팀동료들끼리 허심탄회하게 ‘잘한 것’과 ‘좀더 잘할 수 있었던 것들’을 좀더 꼼꼼하게 따져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시청률이 좋은 프로그램은 대체적으로 잘 만들어진 프로그램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시청률이 프로그램을 판단하는 절대요인이 아니라는 것은, pd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시청률은 나빴으나 ‘잘 만든’ 프로그램, 비록 시청률은 좋았으나 ‘잘 만들었다고는 할 수 없는’ 프로그램 등, pd들만이 볼 수 있는 ‘독자적인’ 기준을 가지고, 정리를 하는 일들이 일상화되어야 하지 않을까.
|contsmark6|‘프로그램 잘봤어.’회의시간. 오늘도 이 말만 덩그라니 던지고 침묵하는 pd들을 본다. ‘잘봤어’가 아닌, ‘잘 봤는데…’가 가능한 날은 과연 언제일까.|contsmark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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