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의 눈] 트랜스포머, 해리 포터, 그리고 다크 나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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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현실이 아닌 시공간에 살고 있는 것 같다. 커다란 대합실에서, 언제 올지 모르는 기차를 기다리는 기분. 그것도 <매트릭스>에 나오는 지하 터널마냥, 시간도 공간도 알 수 없는 이상한 플랫폼에서. 올 건지, 혹은 오지 않을 건지, 알 수도 없는 기차를….

7월 18일, 업무에 복귀했다. 책상 위에는 매니저들이 놓고 간 CD로 고층 아파트가 몇 채나 섰고, 달력은 1월에 멈춰있다. “PD님 잘 지내셨어요? 글램이라구요….” “B.A.P라고 남자 아이돌인데요.” “크레용팝인데 MBC에서 많이 도와주셔야죠.” 그 사이 무슨 아이돌 그룹이 이리도 많이 나왔을까. 그래. 시간이 많이 지나긴 했지. 내가 마지막으로 출근한 게… (다시 달력) 아, 1월. 그래. 그때는 한겨울이었지. 참 추웠는데…. 응? 1월? 에이, 거짓말. 어제 벗어 놓고 간 슬리퍼가 여기 그대로 있지 않은가. 밑바닥까지 다 들여다봐서 이제 더는 알고 싶지 않은 사람들의 속마음도, 서로 눈 마주치고 싶지 않은 불편한 사무실 분위기도. 이곳은 어느 것 하나 변한 게 없는데 뭐가 6개월이나 지났단 말인가.

▲ 영화 <다크 나이트 라이즈> 포스터
시도 때도 없이 시간이 혼동된다. 겨울 노래를 틀다가 퇴근한 것 같은데, 출근해보니 여름. 계절이 오가고, 밤낮이 오가고, 순식간에 1,2년이 오간다. 책상에 놓인 사진. 촛불을 든 세 여자. 저건 올해 1월일까. 아니면 작년? 아니, 재작년인가?  

영화<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보고 나오는 길에도 데자뷰가 찾아왔다. 할리우드의 명품 시리즈 하나가 또 막을 내리는구나. 가만…. 그 해 여름에도 비가 참 많이 왔었지. <트랜스포머>랑 <해리 포터> 시리즈가 끝이 났고…. 그래. 왠지 한 시대가 끝이 난 것 같아 쓸쓸했는데…. 그러다 그만.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 속에, 덜컥 들어와 버렸다.

그 해, 라디오는 난도질을 당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MBC 라디오와 함께 한 이들이 속절없이 잘려나갔고, 징계와 전보, 협박은 일상이 되었다. 처음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애초에 그런 것은 없었다. 똑똑한 어른들은, 힘 센 놈과 싸워 이기는 것은 이야기 속에나 나오는 결말이라고, 침묵으로써 자신의 입장을 대변했다. 너희도 참 딱하다는 표정. 우리는 기대했고 분노했고 체념했고, 나중에는 가슴속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을 참으며 숨죽여 잠들었다. 뱀처럼 축축하고 끔찍한 볼드모트는 그 모든 것이 즐거워 어쩔 줄 모르는 것 같았다.

그 해 나는, 힘없는 소년이 거대한 악에 맞선다는 할리우드의 이야기가 단순한 동화 이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선과 악의 대결이라는 추상적인 이야기는 어떤 홍상수 영화보다 리얼했고, 나는 이 두 편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강렬한 감정 이입을 경험했다.  

▲ 김나형 MBC 라디오 PD
<다크 나이트>와 <트랜스포머> 그리고 <해리 포터>. 에르메스와 폴 스미스, 알렉산더 맥퀸 만큼이나 결이 다른 이 세 개의 시리즈가 하고 있는 이야기는, 결국 같은 것이다. 약한 자가 일어서고 승리하는 이야기. 공포와 침묵이 종식되고 미래가 찾아오는 이야기. 겁 많은 소년 롱바텀이 볼드모트 앞을 막아서고, 한 팔을 잃은 옵티머스가 디셉티콘을 베어 올리는 장면을 누가 보고 싶지 않을 것인가.

이미 칼을 맞을 만큼 맞은 심장이다. 현실의 결말이 영화와 다르다 해도, 괴로워서 심장이 찢어져 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보고 싶다. 브루스 웨인이 일상으로 돌아와 차를 마시는 장면을, 나는 현실에서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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