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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성모승천일의 오찬’

▲ 영화 <성모승천일의 오찬> 포스터
<Mid-August Lunch> (Pranzo di Ferragosto) (2008)
감독, 주연: 쟌니 디 그레고리오 Gianni Di Gregorio

<Mid-August Lunch> (Pranzo di Ferragosto) (2008) 감독, 주연: 쟌니 디 그레고리오 Gianni Di Gregorio

너무 울어 텅 비어 버렸는가. 이 매미 허물은.” (마쓰오 바쇼, 1644-1694)

바쇼의 하이쿠가 생각나는 무더운 여름. 8월 중순 영화제 개막을 앞두고 거의 매일 야근을 했고 막차를 탔다. 집으로 오르는 언덕 길, 자정을 넘긴 깊은 밤이었지만 달과 해를 구분하지 못하는 매미들이 울었다. 그리고 피곤함에 절은 한 사내의 웃음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그랬다. 갑자기 그가 생각이 났다.

이탈리아에서 8월 15일은 성모승천일(Ferragosto)로 여름 휴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날. 지루한 노동을 끝내고 스스로에게 쉼을 주는 종교적 축일이자 동시에 먹고 마시는 세속적인 축제다.

하지만 오십 대 초반의 쟌니(Gianni)는 로마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누가 봐도 효자인 그는 조울증과 자식 의존증이 심한 노모를 모시고 있다. 결혼도 못했고 협심증도 앓고 있는 그에게, 성모승천일을 앞두고 주변 사람들이 느닷없이 찾아온다.

밀린 집세, 전기세를 들먹이면서 축제 기간 동안 두 명의 할머니(자신의 어머니와 이모)를 맡아 달라는 관리인, 왕진을 왔다가 자신의 어머니를 되려 환자인 쟌니에게 맡기는 얌체 같은 주치의 등. 성모마리아에게 휴식의 은총을 받지 못하는 쟌니에게는 이제 돌봐야 하는 4명의 할머니들이 생긴다.

쟌니는 할머니들에게 음식을 해 먹이거나, 제 시간에 약을 챙겨 주거나, 치매 걸린 할머니의 똑 같은 말을 참을성 있게 들어준다. 정신이 없다. 심지어는 밤에 가출해서 주변 카페에서 한잔 하고 있는 할머니를 찾아오기도 한다. 이쯤 되면 영화는 아이러닉한 코미디를 넘어 슬픔의 페이소스를 자아낸다. 동네 술집 앞에서 그의 친구가 했던 말, “안 떠나나?”는 그에게 그저 호사스런 질문일 뿐이다.

성모승천일 아침, 깜빡잠을 자고 일어난 쟌니에게 할머니들이 100유로 지폐와 함께 점심을 차려 달라는 부탁을 한다.

쟌니는 축일의 오찬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영화가 시작하고 단 한번도 집 밖을 나가지 않은 카메라가 시원스레 텅 빈 로마 시내를 달린다. 샴페인 한 박스, 그리고 교외 강가에서 갓 잡아 올린 생선을 사들고 집으로 온다. 그 사이 할머니들은 통 쓰지 않았던 은제 포크와 나이프, 고급 유리잔을 조심스레 닦아 상 위에 올린다. 그들은 먹고 마시면서 최고의 오찬을 즐긴다.

▲ 오정호 EBS PD·EIDF 사무부국장
어쩌면 이 한 끼를 향해 달려온 영화다. 단순하고 밋밋한 작품이었지만 무엇이 행복이고 축복인지를 새삼 느끼게 해주는 짜릿한 이야기. 비록 이비자나 샤르디니아로 떠나지 못하고 텅 빈 로마의 귀퉁이 아파트에서 한 끼를 즐긴 사람들에게도 행복의 순간은 찾아왔다는 것. 쟌니의 너털웃음이 전하는 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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