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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윤경의 chat&책] 김용준의 ‘근원수필’

“댁에 매화가 구름같이 피었더군요. 가난한 살림도 때로는 운치가 있는 것입니다.”

근원 김용준의 수필 ‘매화’는 이렇게 시작된다. 그렇게 매화가 흐드러지게 핀 풍경을 떠올리며 다음 문장을 읽어내면 예상치 못한 저자의 속내에 웃음이 터진다.

“실례의 말씀이오나 ‘하도 오래간만에 우리 저녁이나 같이 하자’ 고 청하신 선생의 말씀에 서슴지 않고 응한 것도 실은 선생을 대한다는 기쁨보다는 댁에 매화가 성개(盛開)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때문이요, 십 리나 되는 비탈길을 얼음 빙판에 코방아를 찧어가면서 그 초라한 선생의 서재를 황혼 가까이 찾아갔다는 이유도 댁의 매화를 달과 함께 보려 함이었습니다.”

▲ 김용준 <근원수필> ⓒ열화당
흔히 수필은 누구나 쓰기 쉽다고 하지만 가장 쓰기 어려운 글인지도 모른다. 작가들의 말을 빌면 소설은 허구의 상상력으로 또 시는 기교로 자신을 숨길 수도 있지만, 수필은 제 모습을 맨살 그대로 드러낼 수밖에 없는 탓이다. 이 말대로 하면 김용준의 매화라는 글은 너무 솔직해서 엉큼하기까지 한 속내가 드러난다. 그야말로 기교나 겉멋을 벗어던진 담백함과 애써 꾸며내지 않아도 저절로 우러나는 삶의 향기가 묻어난다.

장석남 시인이 오래 마음에 품고 있는 책이라며 소개한 책. 김용준의 근원수필을 나는 그렇게 처음 만났다.

1948년 30편의 수필을 묶어 처음 출간된 ‘근원수필’은 예스럽고 담박하면서도 격조 높은 언어 구사로 글쓰기의 전형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때문에 지금까지도 이 수필집은 광복 전후 남겨진 문장 가운데 ‘수필문학의 백미’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오죽하면 ‘시는 정지용, 소설은 이태준, 수필은 김용준’ 이라는 말까지 있을까.

장석남 시인의 말을 빌면, 글 쓰는 벗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20세기 우리나라 최고의 산문이 무엇인가 격론을 벌인 적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누군가 ‘근원수필’을 꼽자 의기 상통해 밤늦도록 술을 마셨다고 한다. 아직 ‘근원수필’의 진가를 모르는 벗들을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면서 말이다.

이처럼 김용준은 문·사·철(文史哲)을 겸비한 화가·미술평론가·미술사학자·수필가로서 광복 전후 한국의 신세대 화단을 주도하였고 날카로운 비평과 간결하고 호방한 필치로 한국 미술사와 수필문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그는 1950년 월북한, 말하자면 오랫동안 금기시 돼 온 예술가이다. 이 같은 이력으로 인해 그를 모르는 이들이 많다. 남에서는 월북했다는 이유로, 북에서는 당의 방향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남과 북 모두에서 금기시했던 그의 글들이 수십 년 후 아름다운 장정에 어엿한 전집으로 출간된 사실이 씁쓸하면서도 고맙기 그지없다.

김용준은 특별히 화려한 문체를 자랑하지 않는다. 내용도 무엇 특별할 게 없다. 그저 일상의 세목을 잔잔하게 그려내고 있을 뿐인데, 그 잔잔함이 요즘같이 비틀고 뒤집고 억지수를 써야만 겨우 존재를 인정받는 세태에서 오히려 적잖은 감동으로 다가 온다.

아내의 지청구를 받으면서까지 두꺼비 연적을 구한 이야기라든지, 벗에게 판 집이 불뚝불뚝 값이 뛰어도 배 아파하기는 커녕 벗이 미안해하며 보내준 몇 푼의 사례에서 진한 우정을 느낀다든지 하는 이야기 등이 그렇다.한 권의 조촐한 수필집에 이런저런 군더더기 말을 붙일 게 뭐가 있을까.

▲ 송윤경 KBS <즐거운 책읽기> 작가
문득 번잡한 일상을 뒤로 하고, 홀연히 성북동 오르막길을 오르고 싶어진다. 저만치 서울의 성벽이 올려다 보이는 곳에 위치한 김용준과 이태준 그리고 김환기가 사랑했던 수연산방에서 급하게 봄을 맞느라 몸이 달았던 그들의 마음을 느끼며 솔잎 하나 띄워서 내어주는 향긋한 송차 한 잔을 마시고 싶다. 혼자서도 좋고, 두 셋이어도 좋다. 그렇게 수연산방에서 느긋하게 가을을 기다리며 그들이 남긴 책들이 즐겁게 수런거리기는 감흥을 느껴보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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