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행의 편지] 지도자의 천륜(天倫)과 패륜(悖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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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행의 편지] 지도자의 천륜(天倫)과 패륜(悖倫)
  • 이근행
  • 승인 2012.09.20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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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행 전 언론노조 MBC본부 위원장

지지난 주말, 날은 저무는데 아들이 산에 가자했습니다. 몇 번 애비를 따라 산에서 밤을 새운 경험이, 제 딴에는 재미있는 일이었나 봅니다. 그렇지 않아도 초가을 산행의 핑계거리를 찾지 못하던 차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놀아주지 못한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었던 터라 서둘러서 짐을 쌌습니다.

예전에 몇 번 텐트를 쳤던 곳에 이르렀을 때 산은 벌써 어둑했습니다. 랜턴을 켜고 눕습니다. 아이는 바리바리 싸 온 과자, 닌텐도, 아이패드를 텐트 안에 늘어놓고서 잔뜩 신이 났습니다.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 바스락거리는 풀벌레나 짐승의 소리가 무서울 법도한데 애비가 있어서인지 하나도 안 무섭다 합니다. 조그만 텐트 안에서 아이는 신이 났습니다. 그런데 저는 잠이 마구 쏟아졌습니다. 아이와 놀아 주어야겠다는 마음만 앞섰지, 쌓인 피로감 때문인지 눈꺼풀이 자꾸 내려 앉는 걸 견디다, 견디다, 결국은 주체하지 못했습니다.

두어 시 무렵 잠에서 깼습니다. 아이는 벌써 잠들어 있었습니다. 텐트를 나와 주변을 둘러봤습니다. 바람이 세게 불고 나무들이 서로 부딪힙니다. 짐승의 움직임을 따라 잎새들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인지, 열매가 바람에 떨어져 구르며 내는 소리인지 자못 사람을 긴장케 합니다. 외려 제가 무서워집니다. 멧돼지라도 덮치면 큰일이라는 걱정에 잠이 확 달아납니다. 다시 텐트 안으로 들어 와 아들의 자는 모습을 봤습니다. 가을 침낭을 가져 오긴 했지만, 산속의 기온은 제법 싸늘해서 어른인 저도 춥습니다. 아이를 침낭 채 곁으로 끌어당겨 안고서 이 생각 저 생각을 합니다. 놀아주진 못했어도 같이 있어 좋았습니다. 금세 날이 밝습니다.
 

애비라는 게 자식을 혼내기도 하고, 때론 폭군이 되기도 하는 게 어쩔 수 없는 현실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자식에게 있어 애비는 무서움을 막아 주고 추위를 막아 주는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살이에 쫓기는 모든 애비들 또한 늘 잘 해주지는 못해도 마음만은 그런 것일 거라 생각합니다. 아이에게, 잘 잤느냐, 물으니 고개를 끄덕입니다.

이 번 주 취재는 박정희 유신치하 최대의 사법살인으로 규정된 인민혁명당(인혁당) 재건위원회 사건으로 남편과 아버지를 형장의 이슬로 보낸 사람들의 이야기였습니다. 새삼스레 이 사건이 대선정국의 대형 이슈로 떠오른 건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두 개의 판결이 있다’라고 언급한 때문이었습니다. 사건 자체는 2007년 재심을 통해 사법부가 ‘조작된 사건’으로 확정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후보 입장에서는 아버지가 저지른 사법살인을(죄를) 여전히 인정하기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아마 박정희대통령은 딸 박근혜를 사랑했을 것입니다. 딸 박근혜 후보 또한 아버지를 무척 사랑하고 따랐을 것입니다. 그 또한 다 인륜(人倫)이고, 십분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 생각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애비, 이 세상의 모든 자식, 그들에게도 인륜은 박후보의 경우나 마찬가지로 너무나 소중한 것입니다. 그것을 권력의 이름으로 빼앗을 권리는 없습니다.

▲ 이근행 전 언론노조 MBC본부 위원장
지난 12일 새누리당사 앞에서 팔순의 아내는, 그리고 애비의 품에 안겨 잠을 청하지 못한 쉰 살의 아들은, 37년이 지난 오늘도 오열했습니다. 그 고통에 대한 공감없이, 개인을 파괴한 그 권력에 대한 심판 없이, 그 누구든 국가와 국민을 책임진다는 건 가당치 않는 일입니다. 그는 권력의 이름으로 또 다른 가해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과오와 관련한 역사의 진실을 대함에 있어, 그녀가 한 나라의 지도자가 되려고 한다면 응당 개인적인 천륜과 패륜의 틀을 넘어서야 합니다.

사과도 그렇습니다. 결코 몇 마디 정치적 수사로 사람이 바뀌진 않습니다. 사람이 바뀌는 건 자신이 깨어지는 고통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인혁당 취재를 하면서, 아들 생각을 참 많이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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