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의 눈] 오직 나만이 날 구원해
상태바
[PD의 눈] 오직 나만이 날 구원해
  • 박유림 EBS PD
  • 승인 2012.10.25 15:3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친구를 만났다. 그녀의 부모는 최근 22년 결혼생활을 정리하셨단다. 결혼 초부터 아버지의 폭행과 폭언, 반성과 화해를 지난하게 반복해왔던 그 결혼은 만 22년이 지나고서야 어머니가 ‘더는 희망 없음’을 완전히 받아들임으로써 종지부를 찍었다. 여기까지는 특별할 게 없었다. 친구의 서술도 담담했다.

나는 딱히 건넬 말이 없어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정도의 문장을 생각하던 찰나, 펑펑 울기 시작했다. 나 말고 내 친구. 이렇게 사람들로 가득 찬 카페에서! 카페 내 이목이 압도적으로 집중됐다. ‘이 모든 게, 엉엉, 나 때문이야. 내가 엄마 삶을 엉엉 엉망으로 만들었어’라는 대성통곡의 고해성사. 위로고 뭐고, 우선 이 압도적인 주목을 피하려면 그녀 이야기를 완벽히 집중해 들어야 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이혼을 결정하고 이런 회고를 하셨단다. ‘네가 3살 때, 무던히도 네 아버지에게 맞았던 날이었지. 이렇게 살 순 없다고 생각한 난, 널 재우고 조용히 짐을 싸 그 지긋지긋한 집을 나오려 했다. 현관을 나서려는 찰나, 어린 것이 어찌나 촉이 빠른지, 네가 자다 깨 나와 내 다리를 부여잡고 엄마 어디 가느냐고 그렇게 울었다. 그때 주저앉은 게 이렇게 20년이 되었다.’ 친구는 세 살 때의 행동을 반성하고 있었다.

그 때 엄마 다리를 잡지 않았다면, 엄마 인생이 이렇게 엉망이 되지는 않았을 거라고. 젊었을 때 아빠와 갈라섰더라면 지금처럼 무기력하게 당장 내일의 밥벌이를 걱정하지 않을 텐데, 쉰 살에 앞날이 구만리인 자식들을 데리고 빈손으로 출발하는 엄마가 너무 안쓰럽다고 서럽게도 울었다.

세상에, 딸을 앞에 두고 한다는 삶의 회고가 고작 딸 탓이라니! 그리고 그 말에 대성통곡하며 3살 때 행동을 반성하는 이런 등신 같은 20대가 다 있나, 화가 났다. 내가 화낼 일은 아니었는데. “정신 차려 이것아!” 내 일갈에 친구는 눈을 동그랗게 떴고 동시에 울음을 멈췄으니 어쨌든 효과는 있었다.

“오직 네 어머니만이 네 어머니의 삶을 구원하고, 너 역시 오직 너만이 네 삶을 구원 할 수 있어. 네 어머니의 삶이 지금의 모습인 건 네 탓도 네 아버지 탓도 아냐. 어머니가 네 탓을 하려고 그런 말씀 하신 건 아니겠지만 본인의 선택을 타인의 탓으로 돌린다면 삶의 주인으로서 자격이 있는 건가? 너도 네 어머니도 도대체 자기 삶의 주인이냐, 하수인이냐?” 위로를 기대했는데 일갈을 마주해서 인지 암튼 그날의 소동은 나의 분노로 마무리됐다.

뜬금없는 연결일 수 있겠으나 2012년 대선 후보들 역시 내 삶을 구원해 주겠다고 해 나는 여간 당황스러운 게 아니다. 예전의 슬로건이 경제 살리기, 지역주의 극복 등 전체 방향성과 관계된 것이었다면, 2012년에는 내 꿈이 이뤄지는 나라, 사람이 먼저다, 내 선택이 나라를 바꾼다든지 하며 개인 삶에 주목한 것 일색이다.

▲ 박유림 EBS PD
도대체 무슨 수로 대통령이 내 삶, 꿈을 이뤄주겠다는 건가? 왜 나라가 내 삶을 중심으로 두겠다는 거지? 내 삶은 오직 나만이 관할할 수 있으니 부디 내 영역으로 남겨줬으면 좋겠다. 오직 나만이 내 삶을 구성하고 내 선택이 날 구원하듯이 대통령 후보 각각의 구원 역시 개개인의 마음을 얻어 보겠다는 알량한 슬로건을 통해서가 아니라 지금까지 그들의 선택과 삶의 궤적이 각자를 구원할 것으로 믿는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