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의 눈] 늦가을, 오토바이를 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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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의 눈] 늦가을, 오토바이를 타다
  • 송일준 MBC PD
  • 승인 2012.10.31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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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일준 MBC PD

일요일. 겨울이 오기 전 오랜만에 장거리 라이딩을 하기로 했다. 서울에서 동해안까지 주로 지방도를 달리는 길은 단풍이 막바지일 것이다.

이른 아침. 어슴푸레한 안개. 싸늘한 공기가 살갗을 파고든다. 오토바이는 곤히 잠들어 있다. 커버를 벗겨 낸다. 맨손으로 오일 탱크를 쓰다듬는다. 유려한 곡선의 감각적인 느낌. 키를 꽂는다. 기어가 중립에 들어 있는 걸 확인하고 셀모터 스위치를 누른다. 두당 탕 탕 탕. 몸서리를 치며 1500cc 심장을 가진 괴수가 단숨에 깨어난다.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듯 으르렁거린다. 불안이 살짝 고개를 쳐든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기대와 흥분이 뒤섞인 기분 나쁘지 않은 불안이다.

왼발로 기어를 끝까지 내린다. 왼손으로 클러치 레버를 당기고 오른손으로 가볍게 스로틀을 당긴다. 부아아앙. 엔진이 앙칼진 교성을 내지른다. 살며시 브레이크 레버를 놓는다. 두두두두. 뒷바퀴가 지면을 박차고 달려나간다. 활에 떠는 현악기처럼 스로틀의 미세한 움직임에도 엔진은 즉각 반응한다. 되풀이되는 긴장과 이완. 어느 순간 내 몸의 비트와 오토바이의 비트가 일치한다. 마침내 나는 오토바이와 하나가 된다.

한 시간 남짓 달리자 강원도 시골 길로 접어든다. 해는 이미 동쪽 산꼭대기에 올라섰다. 따스한 햇살 속 세상은 온통 단풍 천지다. 계절이 만들어내는 신묘한 조화. 눈부시다.

고단 기어는 그대로 두고 스로틀만 되감는다. 속도가 느려진다. 두둥 두둥 두둥. 힘에 부치는 엔진 소리가 한결 심장 소리 같다. 허리를 세워 바람을 전신으로 받는다. 가죽재킷을 뚫고 들어온 차가운 바람에 몸의 세포들이 화들짝 놀라 일제히 눈을 뜬다. 양쪽 눈가로 가을 산들이 번지는 물감처럼 흘러간다. 하지만 저 앞 불타는 산들은 미동도 없다. 귓가에서 소란을 피우는 바람 소리와 쿵쾅거리는 배기음만 없다면 나는 지금 오토바이를 타고 있는지 바위 위에 앉아 있는지 헷갈릴 지경이다. 머릿속이 맑아진다. 선은 잡념을 없애고 정신을 통일하여 진리를 깨닫는 행위라고 한다. 내게는 바로 오토바이 라이딩이 선이다.

여섯 해 전. 변변한 취미 하나 없이 삼추가 일각처럼 지나가 버린 스무 몇 해의 방송사 PD 생활. 이렇게 그냥 나이 들어 가는 건가. 오토바이가 떠올랐다. 고동소리에 가슴이 뛰고 인공 기계가 내뿜는 아이러니한 야생미에 넋을 빼앗기곤 했던 기억들과 함께.

오토바이를 능숙하게 다루려면 대담함, 자기절제, 그리고 정확한 계산 능력이 필요하다. 구심력, 원심력, 관성력, 중력. 모두 오토바이를 탈 때 상대해야 하는 힘들이다. 라이더는 오토바이와 하나가 되어 이 힘들의 균형점을 순식간에 찾아내야 한다. 그 위에 얹혀서 물 흐르듯 커브를 돌아 나가는 모습은 아름답다. 나도 처음엔 쉽지 않았다. 넘어져 다칠 뻔한 적도 있었다. 그저 힘으로 오토바이를 이기려 했기 때문이다. 오토바이에 작용하는 힘들을 완력으로 찍어 누르며 밀고 나가는 라이더는 보기에도 미울 뿐 아니라 위험하다. 자신만이 아니라 남까지 다치게 한다.

서울~동해안 왕복 550km는 단풍의 바다를 가로지르는 황홀한 항해였다. 시골 음식점의 막국수, 촌 아낙이 만든 인절미, 바닷가 카페의 향기로운 커피는 덤이었다.

▲ 송일준 MBC PD
그래서 권한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인생의 헤어핀 커브에 절망하려는 사람들과 스스로의 삶을 배반하고 남을 해하고 있는 이들에게. 오토바이를 타보라. 어떤 길을 어떻게 달려야 할지 알게 될 것이다. 순리가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추해지지 않고 나이 들어갈 수 있다. 나는 요 몇 년 경악스런 몰상식과 부조리의 세월을 오토바이를 타고 건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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