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 칼럼] 앞으로 딱 5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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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8월 크게 기대하지 않고 두드린 한 신문사에 인턴사원으로 합격한 적이 있다. 그러나 막상 첫 출근날이 다가오면서 나는 견딜 수 없을 만큼 큰 갈등에 휩싸였다. 찌는 여름날 한번 입어보지 않은 정장을 입고 아침 일찍 출근하는 것도 싫었지만, 더 큰 문제는 기자보다는 PD되기를 소망해왔던 나로서는 그리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처럼 큰 기회를 미천한 내가 해보지도 않고 거절한다는 것도 너무나 건방진 처신 같았다.

‘이 일을 어떻게 할까. 그래! 결정했어!’ 결국 나는 친구 소개들 통해 잠실에 있는 한 역술인을 찾아갔다. “MBC, KBS, SBS 등 출연”이라는 홍보 문구는 나에게 더더욱 신뢰성을 주었다. 내 미래를 이 낯선 역술인에게 맡기려하는 내 자신이 못나게 느껴지긴 했지만, 자문을 구할 때마다 사람들의 답이 틀리고, 그에 따라 내 마음도 이리저리 흔들리는 상황에서 나는 차라리 운명이라는 끈이라도 붙잡고 싶었던 것이다.

▲ 'PD연합회보' 2002년 3월 8일자

30여분간 내 고민 듣던 그 청학동 총각은 한문 몇 글자를 휘갈겨 쓰더니 “신문도 좋지만, 연말쯤에 기계를 만지는 직업을 가지게 될 운이 있다”고 입을 땠다. ‘기계라. 혹시 편집기를 만지는 PD아닐까?’ 나는 그게 “PD가 되어야한다는 운명이냐고, 기자를 포기해도 되냐”고 몇 번을 되물었고, 그 청학동 역술인의 끄덕임을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집으로 돌아와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내일 출근을 못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내게 굴러 들어온 복을 차버린다는 불안감이 날 위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남은 것은 PD밖에 없다는 절박함이 더욱 나를 다그치는 기회가 될 거라는 자위가 한편으로 마음을 가볍게 했다.

이제 PD가 된지 1년 남짓. 이 기간동안 나는 몇 차례 정도 다시 그 역술인을 찾아가고 싶었다. 때로는 PD라는 것이 너무 행복해서 그 때의 결정에 큰절하고 싶어서, 때로는 왜 그때 PD하라고 해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냐고 멱살잡고 내동댕이치고 싶어서다. 그러나 PD라는 직함 하에 이런 고민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로 감사한 일이다. PD라서 생기는 어려움이나 힘겨움은 때론 PD라는 이름만으로 그 상처가 치유되기도 한다.

1년이 지나면서 방송사의 생리에는 어느 정도 내 몸을 익숙케 한 듯 하지만, 아직 떨치지 못하는 두려움이 있다. 촬영한 테이프를 들고 편집기에 앉을 때마다 생기는 두려움. ‘혹시 내가 아버지 아폴로의 태양전차를 타고 자기 깜냥으로 주체를 못해 천지 구석구석을 태우고 아프리카지역 사람들의 피부색마저 까맣게 태웠던 파에톤이 아닐까.’ 앞의 두 개의 스크린과 편집기는 불길을 뿜어내는 말과 마차로, 쥐고있는 편집기의 키버튼과 조그셔틀은 마차의 말고삐로 오버랩된다.

단기간의 입사시험 과정은 꼼꼼한 준비와 이미지 연출로 통과했다지만, 잘못된 판단과 과신으로 대중들의 마음을 까맣게 태우는 상황이 생긴다면 어쩌지. 그것은 역술인의 도움으로도 해결이 안 될텐데 말이다. 그러나 다행이 이런 걱정은 나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거라 믿기에 기분 나쁜 걱정은 아니다.

때론 힘들기도 하고 때론 벅차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버거움은 PD로서 느끼는 행복함에 대한 작은 겉치레가 아닐까한다. 지금 내 휴대폰에는 “앞으로 딱 5년이다”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내가 정말 괜찮은 PD가 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 앞으로 5년간 모든 걸 투자하겠다는 나의 의지이고, 5년 뒤에 내가 바라던 모습이 아니라면 과감히 이 자리를 떠나야한다는 나에 대한 선전포고이기도 하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5년 뒤 휴대폰에는 아직도 “앞으로 또 딱 5년간이다”라는 문구가 남아있을 것 같다. 아니 남아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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