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지금의 문명을 이루기까지 빠질 수 없는 게 바로 ‘공부’다. 지금으로부터 4000년 전 수메르 문명의 점토판에도 나와 있을 만큼 공부에 대한 인류의 열정은 언제나 뜨거웠다. KBS 1TV <공부하는 인간-호모 아카데미쿠스>(이하 <공부하는 인간>)는 문화인류학적 접근을 통해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 이뤄지고 있는 ‘공부’가 과연 무엇인지 들여다봤다.
그동안 ‘공부’에 관한 방송이나 책은 학습법 내지는 공부 잘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공부하는 인간>에서는 각 문화에 따라 공부가 어떻게 다르며 왜 다른지에 대해 접근하면서 우리나라에서 하고 있는 공부의 모습을 살폈다.
<공부하는 인간>을 연출한 정현모 PD는 “우리 사회에서는 시험문제 푸는 능력을 길러서 좋게 성적을 받는 걸 공부라고 착각하고 있다”며 “공부에 대한 문제제기를 제대로 해봐야겠다는 생각에 공부를 인류학적인 틀에서 이야기했다”고 설명했다.

제작진은 여러 문화권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공부형태를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자란 4인의 하버드 학생들을 프레젠터로 내세웠다. ‘인종의 용광로’라 불리는 하버드에서 한국계 유대인 릴리, 한국인 이민 2세 스캇, 유럽계 미국인 제니, 중동계 미국인 브라이언을 선발, 이들의 눈으로 세계 각지의 공부를 바라봤다. 정 PD는 “우리의 공부를 타인의 관점으로 봤을 때 우리에게 빠진 것이 무엇이고 제대로 길을 가고 있는 건가 자문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들이 바라본 동양의 공부는 매우 낯선 것이었다. 공부에 대한 열정은 뛰어났지만, 공부에 대한 생각과 모습은 그들과 매우 달랐기 때문이다.
1부 ‘오래된 욕망’에서 4인의 프레젠터는 온 거리가 학원인 대치동의 밤풍경과 노량진 고시촌의 모습을 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밤 10시가 되도록 공부에 매진하는 학생들의 목표는 좋은 대학에 진학해 좋은 직장을 얻는 것이다.
한국 학생들은 대학이 인생의 많은 부분을 결정하며 시험을 망치면 인생이 불행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학생들에게 공부란 보장된 미래를 위한 일종의 보험이다. 이러한 모습은 중국과 일본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미국에서 자라 미국에서 공부한 4인의 프레젠터에게 공부란 지적 호기심의 충족이며 지적인 만족감을 얻기 위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서양에서는 관심 있는 한 가지 분야에서 성취를 보이는 공부를 중요시하지만 한국에서는 다방면에 뛰어난 성과를 내는 게 중요하다.
2부 ‘공자의 후예’에 등장한 이른바 ‘강남엄마’는 “한 학생의 성적은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 가족의 문제”라고 말한다. 반면 ‘개인’과 ‘독립성’을 중시하는 서양에서는 개인의 만족을 우선으로 여기는 만큼 성적보다는 지적 호기심 충족이 중요하다.
외부와 단절된 채 홀로 외롭게 공부하는 노량진 고시촌의 모습도 우리에게는 익숙하고 당연한 풍경이지만 프레젠터에게는 생소하기만 하다. 공동체 문화를 중시하는 한국에서 공부 방법만큼은 지극히 개인적인 모습을 보인다. 반면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서양에서는 오히려 공부할 때 여럿이 함께 하는 문화를 지니고 있다.
정 PD는 “한국 사람은 사회적 기준을 생각하면서 공부한다”며 “그런 사회적 기준에 집착하는 공부를 하면서 우리나라의 공부는 훨씬 더 개별화되고 자기 밀실에 갇히게 됐다”고 꼬집었다.
공부하는 모습만큼이나 방법의 차이도 문화적 영향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다. 제작진은 3편 ‘질문과 암기’에서 공부문화를 크게 ‘암기’와 ‘질문’으로 나눴다.
유대인의 공부는 끊임없는 ‘질문’과 ‘토론’이다. ‘마타호쉐프(네 생각은 뭐니?)’가 공부의 핵심인 유대인의 공부철학은 항상 토론하는 사람들의 소리로 시끄러운 이스라엘의 유대인 도서관 ‘예시바’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 같은 공부방식은 유대인의 종교인 유대교에서 성경인 ‘토라’ 내용을 놓고 서로 토론과 논쟁을 벌이며 기도하는 방식으로, 유대인들의 공부법에도 영향을 미쳤다.
반면 인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암기’다. 16가지 공식만 외우면 세상의 그 누구보다 빨리 계산할 수 있다는 ‘베다 수학’처럼 암기가 인도 공부의 핵심이다. 수많은 신을 모시는 힌두교를 믿는 인도인에게 암기란 지식 습득의 첫 번째 관문이다.

그래서 제작진은 3편의 연장선인 4편 ‘최상의 공부’에서 최고의 공부는 개인의 밀실에서 벗어나서 함께 생각을 나누고 협력하고 교류하는 공부라고 말한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의 ‘포멀 디너(formal dinner)’, 필립스아카데미의 ‘하크니스 테이블(Harkness table)’을 노량진 고시촌, 재수학원의 모습과 교차해 보여주는 이유도 단순히 서양식 공부법이 뛰어나서가 아니다.
정 PD는 “어떤 공부법을 배우기 보다는, 다른 문화의 공부를 보면서 결핍돼 있는 문화적 요인들을 돌아보길 원했다”며 “지금 우리 사회의 개별적이다 못해 이기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현상을 반성하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4편으로 모든 이야기를 하기에 부족했던 제작진은 오는 28일 방송될 ‘한국 공부를 말하다’에서 ‘우리는 왜 공부하는가’, ‘좋은 공부란 무엇인가’를 토론하며 우리 사회의 공부를 깊게 들여다 볼 예정이다.
<공부하는 인간>은 어느 문화가 우월하다, 어느 공부법이 뛰어나다고 말하는 프로그램이 아니다. <공부하는 인간>이 우리에게 던지는 진짜 메시지는 ‘성찰’이다. 문화적 유산이 아니라 경쟁사회에 의해 수단으로 전락한 공부에 대해 던지는 나지막한 경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