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따져보기]서스펜스의 성공 ‘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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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드라마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퓨전 사극이나 트렌디물 일색의 한국 드라마는 아쉬운 볼거리다. 스릴러나 호러, SF와 같은 다양한 장르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드물게 시도되었던 장르 드라마들은 대개 소수의 팬덤을 양산하는데 그치거나 이도저도 아닌 꼴로 실패했다.

이는 작가의 부재보다 시스템의 관성으로부터 기인한다. 편성이 결정되었더라도 방송이 시작되고 나서야 수입이 발생하기 때문에 사전 제작은 엄두를 낼 수 없다. 시청자의 반응을 실시간으로 탐색하고 반영하느라 작품 전반을 관통하는 작가의 비전이나 미감은 ‘여유’가 되고 간접광고(PPL)을 얼마나 끌어오느냐가 성공의 기준이 된다.

연애물이나 사극은 쪽대본으로 하루 찍어 하루 방영하더라도 완성도와 무관하게 버틸만한 노하우가 축적되어 있다. 비슷한 드라마를 반복해서 만들어도 시청률이 나오는데 굳이 다른 걸 실험할 이유가 없다. 이런 환경 안에서 서사의 짜임새가 무엇보다 강조되는 본격 장르물은 균질한 완성도를 담보하는 게 불가능하다.

▲ tvN <나인-아홉번의 시간여행> ⓒtvN
그나마 케이블 채널에서 국산 장르 드라마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채널 입장에선 공중파 드라마와의 차별화 전략상 나쁠 게 없는 선택이다. 대개 유명 미드를 노골적으로 벤치마킹한 것이었지만 그렇게라도 경험치가 쌓여갔다.

현재 tvN에서 방영 중인 <나인- 아홉 번의 시간여행>(이하 <나인>)은 그간 등장했던 본격 장르 드라마 가운데 가장 뛰어난 완성도를 보이는 작품이다. 완전 사전제작은 아니다. 그러나 총 20부작 가운데 절반 정도의 사전 제작이 이루어졌다. 3년간의 기획을 거쳤고 59억원 가량의 제작비가 소요된 것으로 알려졌다.

<나인>을 만드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다루고 있는지에 대해 매우 명확하게 알고 있는 듯 보인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얼개에 대해 작가가 얼마나 뚜렷한 비전을 가지고 있는지, 그러한 이야기를 연출자가 얼마나 잘 이해하고 나아가 비전을 공유하고 있는지, 단 두 편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언뜻 <나인>은 영화 <나비효과>와 드라마 <24>를 연상하게 만든다. 이야기는 <나비효과>에서, 구성은 <24>에서 참조한 구석이 자주 발견된다.

스무개가 넘는 에피소드 안에서 두세개의 굵직한 갈등을 운용하며, 하나의 갈등이 해결되고 이야기가 끝난 것처럼 느껴질 때 그에 대한 연쇄반응으로 또 다른 갈등이 발화되는 <24>의 방식이 <나인> 안에서 매우 효과적으로 쓰이고 있다. 극 전반에 허술하게 낭비되는 구간이 거의 없다보니, 기계적인 인용이나 복제가 아니라 이야기를 영리하게 끌고 가기 위해 선택된 답안으로 느껴지게 된다.

<나인>은 시간 여행을 다룬다. 이 소재는 이미 낡고 식상한 것이다. 그러나 <나인>은 시간 여행이라는 아이템에 다양한 제약 조건을 설정함으로써 소재의 고루함을 극복한다.

원하는 시점으로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20년 전의 시점으로만 갈 수 있다는 점, 시간 여행을 가능하게 해주는 향이 아홉 개 밖에 없다는 점, 향 하나가 완전히 연소될 때까지 걸리는 30분 동안만 과거에 머물 수 있다는 점 등의 설정으로 주인공에게 제약 조건을 걸어두고 이를 통해 순간순간 서스펜스와 이야기의 동력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건 사실 장르물의 기본기다. 그러나 이러한 장치들을 적절하게 사용할 줄 아는 한국 드라마를 만나는 일은 꽤 드문 일이다. 끝까지 쫓아가고 싶은 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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