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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판에서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는 행복
무속과 함께 한 20년 삶의 기록을 반추하며
김영환

  • 승인 1997.09.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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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0|제2회 광주비엔날레 특별전 ‘삶의 경제-한국의 샤머니즘과 현대미술’에 참가중인 김영환 pd는 20년간 전국의 굿판과 상장례의식이 벌어지는 곳을 찾아다니며 채록해온 사진작가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회에서 그는 ‘하늘 가는 길-한국인의 상장례의식’이라는 주제로 그동안 촬영해온 삶과 죽음의 의례 1백40여컷의 슬라이드 쇼를 펼치고 있다. 이 글은 20년 그 자신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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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2|1. 나의 너무나도 보잘 것 없는 화두(話頭)?여시아문(如是我聞)-그래 총칼이 서슬퍼르게 살아 있었고 숨이 막혔던 유신시대에 금방 통일이 된다고 믿고 싶었던 부끄러운 세대.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래 전생에서 그래도 이승에 태어날 덕을 쌓았는지 부모님 잘 만난 덕분에 대학까지 들어선 이 놈은 세상 겁도 없이 천방지축 날뛰었다. 그러다가 학교앞 물대포, 최루탄가스(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우리나라 최루가스는 세계적으로 유명하여 수출까지 했던 시대가 있었다)에 혼비백산하며 학교뒷담을 넘어 민가로 도망치면서 나는 부끄러워했다. 매캐한 냄새로 눈물 콧물이 뒤범벅되고. 서양실험주의 연극을 한다며 이오네스꼬, 장 클드반 이태리, 그리고 브레히트의 희곡에 심취하고 우리의 연극은 실험주의에서 다시 출발해야한다고 입에 거품을 물었었다. 그러다가 두이 형하고 양주군 유양리에서 생전 처음 본 양주별산대의 탈춤 사위. 그 하늘로 날아가고 싶은 모습의 춤사위. 그때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으면서도 탈반을 만들고 탈운동을 하고 나는 용케 졸업했지만 졸업장을 받지 못하고 학교에서 쫓겨난 후배들을 생각할 때 나는 아직 가슴이 저민다. 삶에 지쳐, 이념에 지쳐, 나에게 지쳐, 나는 회피하러 놀러 어느날 진도에 가게 되었다. 광주에서 진도까지 나의 기억에는 대나무 죽창의 선혈의 황토길이었다. 진도 벽파진 앞. 거기서 나는 넋건지기 씻김굿을 보았다. 그때 최초의 우리나라 원형문화의 문화체험. 저녁무렵, 죽은이의 넋이 손대에 실려 가족들과 커뮤니케이션하고 산자와 죽은자가 같이 어울리고 그 회한의 소리 그리고 당골이 토해내는, 밤하늘을 비수처럼 가르는 그놈의 육자배기소리, 혼과 가슴을 저미는 살아있는 소리, 그리고 혼이 같이 어우지는 지전춤에 취해 있었다.그때 어느 진도할매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 “젊은이 굿을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네”. ‘가난하게 산다’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리고 굿판을 기록하자. 이들의 삶과 고통, 의례를 기록해 두자. 그리고 다시 서울. 마음뿐이었다. 그 기록작업은 장비, 돈, 사람, 엄청난 시간이 전제조건이었다. 그래서 서울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뚱딴지같은 그 소리를 해댔다. 그래 원론적인건 누구든지 필요성을 알고 찬성한다. 현대화 산업화시대에 처음 먼저 소멸되는 것은 항용 그 민족특유의 원형문화라는 것은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외국의 경우에도 그러했다. 안되는 것이구나 나의 역부족이구나 포기할 수밖에 없구나 그런 자멸감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가 경상남도에 있는 고즈넉한 암자 절집에서 하루밤을 지내게 되었다. 노스님에게 젊은 혈기로 그런 이야기를 올리자 그 노스님의 화두는 “너는 아직도 오지 않았는데 왜 그리 갈 것을 걱정하고 있느냐”였다.
|contsmark3|2. 굿판에서 만난 아름다운 사람들, 그리고 새벽 이슬같은 풀잎들대학졸업 이후 나는 용케 방송사에 입사했다. 우리 민족의 삶과 풍습, 민속을 기록하기에는 그 어느 곳보다 좋은 환경을 가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생각한 만큼 쉬운 것은 아니었다. 그래 노스님의 화두가 생각났다. 나혼자라도 해보자. 방송사에서 주는 봉급으로 카메라 ·녹음기를 구입해서 돌아다녔다. 무작정 저인망처럼 물고기를 잡아보자! 참으로 열심히 돌아다녔다. 우리집 사람 표현대로 진도가 무슨 당신 안방이냐고 할 정도로 돌아다녔다. 동해안 오구굿에서 바닷가 굿청. 그들과 노숙하고 밤바람에 나는 외로워 할 시간조차 없었다. 동해안 오구굿판에서 추운 겨울날 그 추위와 함께 찾아오는 초망자위 구슬픈 지모들의 청배소리. 지금은 작고하신 동해안의 유명한 지모 신석남, 변연호, 이금옥. 그들은 내가 불쌍해 보였는지 나에게 따스한 국물과 밥을 주면서 그래 열심히 사진박고 녹음하라고. 항상 만나면 죽변어머니 변연호 지모는 서울에서 뭣하러 힘들게 왔냐고 했다. 나는 그들이 베풀어준 은덕을 언제나 갚을 것인가?그때 나의 작업은 체계적이지 않았다. 그 체계를 잡아 준 사람은 일본의 유명한 민속사진가 가또 다카시 선생이었다. 어느 한국인보다 한국의 민속과 굿을 사랑해서 우리의 민속을 책으로 만드는 일본인. 그때부터 나는 촬영기획을 해가면서 노하우를 배우면서 촬영했다. 우선 촬영한 아이템을 세습무와 마을굿 그리고 상장례의식으로 좁혔다. 그것은 또한 빨리 없어질 것들이었다. 그 중 풍장의례인 초분(草墳). 지금 이 시대에 초분이 있을 것인가? 60년대 박정희시대에 깡그리 없앴는데. 우선 섬으로 돌아다녔다. 마을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 듣고 서서히 초분의 실체가 나의 눈앞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전남 어느 c섬. 어느날 초분 이장할 날을 잡았다고 연락이 왔다. 배를 타면서 그것을 촬영할 수 있을까? 의아심을 가지면서 마을 도착. 역시 촬영을 못한다고. 가족들은 그래도 나의 정성에 카메라 앞에 서 줄 수 있지만 할머니, 지엄한 당신의 육신을 누구에게 보여줄 수 있을까? 나는 이해 할 수 있다. 그 할매의 울음 그것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울음소리였다. 전라도의 어느 이름없는 당골의 마지막을 지켜보면서 나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괴로워했다. 시집도 못가보고 무당의 길로 접어든다는 건 아직도 사회에서 안경쓰고 보고. 그때 나는 이야기 했다. 우리같은 미욱한 인간들은 인간의 세계도 제대로 모르면서 사는데 당신은 얼마나 좋으냐고. 한 생에서 인간의 세계와 신의 세계를 같이 살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삶이라고. 그래 그때 우리의 삶과 민속 풍습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한국민속사진총서를 출판하는 것이 나의 의무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마음이 홀가분하다. 설사 그것이 출판되지 못할 지언정 나는 그것보다 좋은 인연으로 해서 참으로 굿판에서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서 행복했다.
|contsmark4|3. “굿은 살아있는 문화화석(文化化石)”이라고 믿고 싶은 사람의 이야기북방대륙문화와 남방해양문화가 만나는 우리 땅. 저 멀리 몽골 시베리아에서 건너 온 오보(서낭당) 솟대 그리고 샤먼, 굿 또한 남인도 인도네시아 오키나와 등을 거쳐 온 남방문화의 유습인 풍장의례·곡령의례. 우리 땅의 문화는 무엇이고 그 루트는 어디이고 어떻게 민족별로 습합이 되고 어떻게 변화가 되었을까? 그것이 현대에서 잃어버린 인간의 심성을 찾는 것이 아닐까? 신명과 에너지와 휴머니티가 넘쳐 흐르는 굿판의 원초적인 생명력은 어디에서 기인되는 것인가? 자연과 신 앞에서 수평적인 인간관계의 평등원리로서 굿의 사회적 기능은 무엇일까? 인류가 문화를 생성한 후 가장 오래된 문화의 형태를 지닌 것이 굿 아닐까? 굿은 미신일까? 미신으로 치부하기엔 너무나도 많은 문화적 가치를 가진 것은 아닐까? 과연 굿은 사양산업일까?일찍이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선생이 말했다. 한국이 세계에 자랑스럽게 보여 줄 것은 굿이라고. 오늘도 나에게 외국에서 인류연구가가 연락을 해왔다. 굿을 연구하기 위해서. 그들이 왜 굿을 연구하게 하겠는가?그리고 나의 귓전에 들리는 영원한 화두.“굿판에 왜 다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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