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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시인의 사회

사실 이번에는 가을을 느끼고 싶었다.몇 년만에 본 연극 ‘윤동주’에서 느낀 순결한 영혼과 각서 한 장 대신 목숨을 바꾼 비타협정신, 그리고 ‘양희은 1991’판의 노래가사와 선선해진 바람에 함께 묻어나오는 가을의 쓸쓸함과 상큼함을 동시에 얘기하고 싶었다.그러나 일개잡지사가 주최한 구닥다리 [사상검증 토론회]를 방송3사가 모두 달려들어 7시간이나 중계하는 꼬락서니를 보고 곧 그 꿈을 깨버렸다.왜 그래야 했을까. 이 땅에는 여전히 매카시즘이 망령처럼 떠다니고, 대한민국이 전복될지도 모른다며 우리의 건강한 힘조차 자신못하는 레드콤플렉스 신봉자들이 득실거린다. 도대체 지금이 어느 땐데, 새로운 사고혁명을 요구하는 21세기가 코앞에 왔고 남들은 저만치 앞서가는데 여태까지 구시대유물이라니….그러나 내 꿈이 깨진 우울함과 마녀사냥이 계속되는 참담함속에서도 아니라고, 이래서는 안된다는 새까만(?) 후배들의 목소리는 참으로 신선했다.그래서일까. 지난 주말 TV에 방영된 피터 와이어 감독의 ‘죽은 시인의 사회’를 보는 동안 내내 영화속의 학생들과 그 예쁜(?) 후배들이 오버랩되고 있었다.영화의 무대는 59년 가을 뉴잉글랜드 버몬트의 명문고교 웰튼아카데미. 어느날 이 학교에 키팅 선생이 부임한다. 키팅 선생은 겉으로는 엘리트교육을 표방하며 맹목적 권위와 규율속에서 개성은 무시되고 공부만 강요하는 수업방식을 깨버린다. 그는 판에 박힌 시론이 담긴 책장을 찢게 하고 독특한 수업방식을 통해 학생들에게 시와 인생, 사랑을 가르친다. 학생들은 혼자 서서 판단할 능력을 키우게 하는 키팅 선생의 새로운 교육을 통해 자아를 발견하며 비밀클럽 ‘죽은 시인의 사회’를 결성한다. 그러나 연극이 소원이었던 닐이 의사가 되기를 고집하는 아버지에 항의, 자살하자 그 책임을 뒤집어쓴 키팅 선생은 학교를 떠나게 된다.키팅 선생이 학교를 떠나는 날, 학교조치에 아무런 항의조차 못했던 학생들이 교장이 보는 앞에서 ‘나의 캡틴’을 외치며 한사람씩 책상을 밟고 올라선다.바로 그 학생들과 후배들이 겹쳐지면서 참으로 많은 생각을 했다. 이 세상에서 제일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아니 우리 집단이 지금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지금 어디, 어떤 모습으로 서있는 걸까.좋은 프로그램은 창의와 자율속에서 나온다. 상상력과 통찰력은 개인의 개성이 인정받을 때 가능한 법이다. 조직이 권위를 앞세우며 우선 복종부터 강요할 때 프로그램은 판에 박힌 복제품밖에 나오지 않는다. 한사람 한사람의 독특함이 살아나고 그가 하고 싶은 것이 가능할 때, 그리고 그 일을 하는데 걸림돌인 제약이 제거될 때 활력과 의욕은 살아난다.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 감히 창조적 집단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일반 기업체에서도 젊은 사원들의 ‘끼’를 살려 조직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려 하는데, 누구보다도 자유분방해야 할 우리 집단은 후배들의 그 ‘끼’를 살려주기는커녕 입사하면 먼저 조직에 순응하기부터 가르치며 모두가 고만고만해져버리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한번쯤 그들이 하고 싶은대로 마음껏 하게 내버려두면 어떨까. 그렇게 내버려두면 우리 집단은 과연 망할까.굳이 세상이 얼마나, 어떻게 변하는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거창해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지금 당장 확인할 일은 우리 집단이 ‘죽은 시인의 사회’인지 아닌지를 되물어보는 일이다.권위와 명령을 앞세운 조직논리에 앞서, 겁없이 대드는 후배들의 ‘끼’가 유감없이 발휘되도록 해주어야 한다.개인적으로는 우리 집단이 ‘죽은 시인의 사회’가 아니라고 믿고 싶다. 자신들의 정체성조차 조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했지만, 아직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건강한 후배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인가. ‘죽은 시인의 사회’의 그 학생들과 후배들이 자꾸만 겹쳐져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것은. 그리고 어느쪽인가. 내 후배들이 선 자리는…. 맹목적 굴종의 학생들인가, 아니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책상을 딛고 일어서던 학생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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