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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박사의 귀국

방송을 통해 알게 돼 아주 오랫동안 막역한 사이로 지낸 정신과 의사 한 분이 있다.입사 초기 여러 가지 이유로 방황하며 방송사 생활을 견디기 어려워했던 나는, 어느 날 그를 찾아가 내가 미쳤으니 내 정신병을 치료해 달라고 호소한 적이 있었다. 그때 김 박사는 서둘러 병원문을 닫고 술집으로 장소를 옮기고는, 웃으면서 “당신 병은 술 마시면 나아” 하며 술까지 사주며 나의 하소연을 밤새도록 들어주었다. 그런 일이 두 번이나 있었는데, 그때 나는 정신과 의사가 가진 가장 효과적인 치료법이 아무리 위험하고 폭력적인 ‘미친 사람’일지라도 그의 얘기를 끝까지 참고 들어주는 것임을 알았다. 어쨌든 그 술 치료로 내 정신병(?)은 나았고 그런저런 관계로 그분과 나의 관계는 혈연 이상으로 발전하였다.김 박사는 종합병원에 근무하다 상당기간 개인병원을 운영했는데 그에겐 말못할 고민이 있었다. 때가 되면, 아니 틈만 나면 이놈 저놈 달려들어 무슨 핑계든 대고 돈을 뜯어가려 했기 때문이다. 김 박사는 때론 싸우기도 하고 때로 타이르기도 하며 그들의 부당한 처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럴때마다 그는 무엇인가 불이익을 당했고 병원운영에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이럴 때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남들처럼 시비거는 사람들에게 주머니에 돈을 쑤셔넣어주며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옳지 않다고 끝까지 따지며 원칙을 지킬 것인가.어느 교수가 말한 적이 있다. 정부기구축소나 행정개혁이 불가능한 이유는 자신이 가진, 그 부처가 가진 이권을 포기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굳이 이 교수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개인사업이나 자신의 집을 지어본 사람이라면 관련되는 모든 관공서 사람들이 얼마나 괴롭히는지, 또 그 관련부서가 얼마나 많은지 질겁을 할 것이다.이땅에는 슬프게도 쥐꼬리만한 권력이라도 잡은 사람 거의 모두가 그 쥐꼬리만한 권력을 이용해 뭔가 챙기려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그때 김 박사는 이땅을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자신도 자신이지만 원리와 원칙을 강조하던 자식들에게 이 혼탁한 세상에서 더 이상 살아가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스스로 맞서 싸워 고치려 했지만 실패했던 이땅의 부조리와 모순에 대한 자신의 경험과 고민을 자식들이 또 경험하고 고민하게 할 수는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땅이 싫다며 4년전 훌쩍 호주로 이민을 떠나버렸다.그 김 박사가 지난 주 다시 돌아왔다. 4년 동안 주름살도 더 늘고, 흰머리도 훨씬 성성해진 상태로. 그의 귀국을 안 몇몇 지기들과 김포에서 그가 좋아하는 매운탕을 함께하면서 생각했다. 무엇이 그를 돌아오게 했을까. 아무리 미워했더래도 조국은 조국일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구수한 이웃과 동료와의 관계가 그리워지고 매운탕을 비롯한 감칠나는 우리 음식을 잊지 못해서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잠시 잊었지만 그래도 이땅에 대한 희망을 도저히 버릴 수 없었던 것일까.김 박사는 지난 주에 앞으로 그가 원장으로 근무할 영천에 있는 정신병원으로 내려갔다.작은 체구에 유난히 성악곡을 즐겨부르며 술 한 잔 들어가면 어린애처럼 천진난만해지는 그가, 돌아온 이땅에서 여전히 사람을 사랑하며 타협 대신 원칙을 지켜가며 살아가기를 바라며 다시 생각했다.오늘 우리의 자화상은 어떠한가. 과연 우리의 ‘자리’는 있는가. 떠날 마음이 들 때는 없었던가. 그러나 김 박사가 돌아오듯이 결코 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겐 어떤 믿음과 희망이 있어, 타협 대신 원칙을 지키며 바른 길을 걸어갈 것인가.<사족>얼마전 어떤 직책을 맡은 내 곁의 한 사람이 그만둔다는 얘기를 들었다. 한 사람이 맡은 자리를 그만두든 계속하든 그 자체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떻게 앞으로를 살아가는가에 있다. 그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실천하며 강하게 열심히 살아가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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