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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헌트

|contsmark0|인권운동사랑방 대표이자 인권영화제 집행위원장인 서준식씨가 제주 4·3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레드헌트’를 상영했다는 이유로 지난 5일 구속됐다. 혐의내용은 지난 9월 홍익대에서 열린 제2회 인권영화제에서 당국의 허가도 받지 않고 국가보안법의 이적표현물에 해당하는 ‘레드헌트’를 상영했다는 것이다.그의 구속을 보면서 우리는 우선 형평성의 문제를 지적않을 수 없다.‘레드헌트’는 이미 지난달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이틀동안 공개상영돼, 많은 사람들이 관람한 영화다. 수사당국은 누구가 어떤 목적으로 상영했느냐가 중요하다고 강변하지만, 동일영화를 놓고 한쪽은 국가보안법이 적용되고 다른 한쪽은 적용되지 않는다면 이미 법집행은 형평성과 정당성을 잃어버렸다고 볼 수밖에 없으며, 오히려 세인의 웃음밖에 사지 못할 것이다.다음으로 최근 양심수가 있느냐 없느냐 논쟁속의 대선정국에서 서씨 구속이 갖는 의미다.서씨는 지난 93년 2월부터 매일 a4용지 두서너장 분량의 ‘인권운동사랑방’을 펴내왔고 이달초 지령 1천호를 맞이한 이 신문을 국내외 5백여 단체가 읽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여기에 지난 다큐영화제에서 중국 천안문 사태를 다룬 ‘태평천국의 문’이 상영불가 판정을 받은 것에서 보듯이 인권문제에 예민한 당국이 인권영화제가 지역으로 확대되는 것을 위축시키고, 또다른 공안정국을 시도하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세 번째로 검열의 문제다. 마땅히 사전심의제도는 철폐되어야 하고 표현의 자유는 당연히 보장되어야 한다. 우리는 검열의 주관적 잣대로 소재와 주제, 표현의 제한을 받은 우리 영화가 얼마나 황폐해졌는지 보아왔다. 더구나 다큐멘터리가 사실을 바탕으로 진실을 추구하는 신성한 작업이라는 걸 인정한다면, 더 이상 ‘태평천국의 문’이나 ‘레드헌트’ 같은 인권영화가 검열이나 상영금지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마지막으로 역사에 대한 진상규명의 문제다. ‘레드헌트’는 1948년 4월 3일 이후 당시 27만의 제주도민 가운데 최소 3만명이 죽어간 이유를 밝히는 83분짜리 다큐멘터리이다. 생존자들의 증언, 미군정 보고서, 당시의 신문보도, 연구자들 인터뷰와 자료화면을 토대로 만든 이 영화가 당국의 말대로 이적표현물이라 치자. 그럼에도 역사의 진실은 손바닥으로 가릴 것이 아니라 대명천지에 내놓아 검증받고 새로운 논의의 기초로 삼아야 한다.그것이 내년 4월 50주년을 맞는 제주 4·3사건의 진상규명에 한걸음 다가서는 길이며, 현 정권이 자랑삼아 얘기하는 역사바로세우기 작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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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3|[pd수첩] 3백회에 부쳐
|contsmark4|문화방송의 [pd수첩]이 3백회를 맞는다.우리는 동료pd로서 그리고 시청자로서 그 동안 [pd수첩]의 제작진이 보여준 열성과 패기에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사람이 살만한 세상을 위하여’ 8년전, [pd수첩]이 탄생하며 던진 화두는 그러했다. 더 이상 어떤 설명도 필요치 않았다. ‘소외된자에게 용기를, 강한자에게 정의를’ 그것은 [pd수첩]이 선택한 참세상 만들기의 방법이었다. 그들에겐 소명의식이 충만했다. 그렇기에 [pd수첩]은 8년동안 시청자의 사랑을 단 한순간도 놓쳐본 적이 없었다. 그후 [pd수첩]과 함께 우리 방송에는 많은 시사고발 프로그램들이 등장했다. 그러나 불의와 부정과의 싸움은 오히려 점점 더 힘겨워져만 갔다. 약자들의 소외현상은 더욱 심화돼가는 반면 , 강자들은 점점 더 영악해져 갔기 때문이다. 그들의 손엔 자본과 권리라는 새로운 무기가 들려졌으며, pd들의 손엔 출두명령서와 시청률표라는 수갑이 채워졌다. 이러한 현상 때문에 최근 시사고발 프로그램들이 정의롭지 못한 강자를 찾아 나서는 대신, 소외된 약자들을 때리러 나서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히 걱정스럽다. 최근 우리 시사프로그램들의 선정성이 위험수준을 넘어선 게 아니냐는 지적도 이러한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만 할 문제가 있다. 시사프로그램들의 선정성 문제가 발생되는 배경이다.혹자는 시청률 경쟁 때문이라고 속단할 지 모르지만 그것만이 정답은 아니다.문제의 핵심은 시사고발 프로그램들이 소위 정의롭지 못한, ‘가진자’와 ‘쥔자’들에게 정면으로 도전할 수 없다는 데 있다. 바로 조직의 자기검열성 내지는 외압굴복성 때문이다. 우리 방송이 문민이라는 얄팍한 표피속에 깊이 도사리고 있는 권력굴종의 기회주의적 속성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시사고발 프로그램들은 방향성 잃은 포식성 ‘너절리즘(?)’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결국 입맛 당기는 선정물만을 찾게되는 ‘몬도가네 저널리즘’화 될 가능성은 당연한 것이다. 만약 그러한 경향이 있다면 그 책임은 pd에게 있다기보다는 담당조직을 총괄 지휘하는 데스크와 그 상급 책임자에게 있음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시사고발 프로그램 pd들이 ‘사람이 살만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싸워야할 거악(巨惡)의 실체는 경우에 따라 밖에 있지 않고 안에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pd수첩]에 대한 제작진의 긍지가 외압에 굴하지 않는 pd들의 자유롭고도 독립적인 정신에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다시한번 [pd수첩]의 3백회를 축하하며 우리 사회의 거악(巨惡)에 도전하는 새로운 시사프로그램으로 변신하여 동료들과 시청자들의 사랑을 지켜가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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