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당해보지 않고는

60여일간의 파업을 마무리한 후 EBS PD협회장이 말했다. 세상의 무관심과 사태해결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갖기도 어려웠고, 두 달 동안 월급을 받지 못해 모두들 적금을 깨거나 카드대출로 연명하는 등 참으로 힘들었다. 그러나 얻은 것이 더 많았다. 평소 얘기할 시간조차 없던 동료·후배들끼리 파업이라는 피부접촉을 통해 서로를 확인하게 되었고, 사람에 대한 믿음과 교육방송의 미래에 대한 희망과 애정을 얻었다라고.그 말에서 이해는 경험 공유에서 가능하고, 그중에서도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피부접촉이라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경험해본 사람은 누구나 다 인정할 것이다.후배 한 사람이 만성간염으로 또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다. 일이라면 누구보다 먼저 몸을 던져 덤벼들고, 후배들 고민이라면 밤샘술도 마다 않으며 나서서 해결하던 그였다. 건장한 체구에 유난히 얼굴색이 희었던 그의 검고 야윈 얼굴을 보고 얼마나 놀라고 가슴아팠던지…. 불현듯 위암으로 세상을 떠난 윤기철 프로듀서의 얼굴이 떠올랐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처음엔 건강했으며, 너무나 열심히 일했으며, 결국 쓰러졌다는 사실이다.걱정부터 앞섰다. 혼신을 다해 좋은 프로그램 만들기에 자신을 희생했지만 일과 위암과의 연관관계를 찾지 못했다는 이유로 윤 PD를 죽을 때까지 방치했는데, 그 후배에게도 직접적 원인을 따지고, 규정과 타 직종과의 형평성을 따지고, 그러면서 모든 책임을 그에게 돌려버리고 슬그머니 발뺌하지 않을 지…나는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라는 지역보다 한 시간쯤 더 북쪽에서 군 복무를 했다. 작대기 하나를 달고 하늘이 세 평 반이라는 그 오지에 도착했을 때, 공교롭게도 무장공비가 넘어와 있었다. 지리적 적응도 못한 채 나는 첫날부터 실탄을 장전한 완전무장으로 매복을 나가야 했다. 개울물 소리는 때로 발자국 소리로 들리기도 하고, 바람 소리는 속삭이는 소리로 들리는 상황 속에서 꼬박 밤을 새며 생각했었다.만약 그들이 내 앞에 나타난다면 과연 나는 총을 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맹호로 월남전에 참전했던 형이 그랬던 것처럼, 오히려 내 위치가 발각돼 내가 죽을 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쏘지 못할 것인가.다행히 그런 최악의 상황 없이 작전은 종료됐다. 지금 그때를 생각해도 여전히 나의 판단을 결정할 수가 없다. 그 상황이 나와 맞닥뜨리지 않은 관념상의 것이었고, 내 선택은 상황이 벌어져봐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때 절실히 느낀 것은 사람이 느끼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은 당해봐야 안다는 것이다.광주항쟁 때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 지역 사람 대부분은 희생자들과 바로 가족이거나 건너뛰어 친척으로 연결된다. 내 가족이, 내 인척이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은 어떤 논리와 설득으로도 설명이 불가능하다. 그것은 그들이 바로 당사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아픔과 슬픔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느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만성간염에 걸린 후배는 윤기철 PD처럼 간기능 검사 결과 수치가 1000에 육박할 때까지 회사의 건강진단에 체크되지 않았다. 그가 쓰러졌지만 여전히 회사의 안전장치는 없다. 헬기 타고 취재하다 떨어져 죽거나 교통사고를 당해 팔·다리가 부러지지 않으면, 다시 말해서 직접적이고 시각적이지 않으면 열심히 일한 대가에 대한 보상은 아무 것도 없다.간부들은 형평성을 들먹이고, 해당 부서는 규정을 들이대며 발뺌하고, 그 가운데서 죽어나는 것은 몸을 던져 일한 뒤 건강이 망가진 당사자뿐이다. 그들은 EBS 사우들이 서로 확인했던 현장에서 피부접촉으로 인한 상대방 헤아림이나, 직접 당해보지 않았기에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선 당사자들의 절박함과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아니 헤아리려는 노력도, 느끼려는 관심조차 없다. 그저 남의 일일 뿐이다.그 후배에게 진심으로 말했다. 앞으로 네가 할 일이 너무나 많다, 그러니 하루 빨리 옛날처럼 씩씩해지라고.그러나 여전히 답답하다. 당한 사람만 아파하고, 그 고통을 이해하고 덜어주려는 노력하는 사람도 제도적 장치도 없는데, 과연 우리는 좋은 프로그램 만들기란 공동목표를 함께 해 나갈 수 있는 것인지…
저작권자 © PD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