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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훈의 인문학 생중계]

네안데르탈인의 최후 유적지는 지브롤터 해변의 고람 동굴이다. 10만년 동안 수백 명이 계속 살았던, 무척 큰 거주지다. 마지막 네안데르탈인은 호모 사피엔스에게 밀려서 이곳까지 쫓겨 온 걸까? 빙하기의 추위를 피해 어쩔 수 없이 따뜻한 고향에 돌아온 걸까? 네안데르탈인은 2만8000년 전에 지상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들은 왜 멸종했을까?

▲ 마지막 네안데르탈인이 살았던 지브롤터 해안의 고람 동굴.
추위 때문이란 설명은 충분치 않다. 기후변화로 이미 개체수가 줄고 있었던 네안데르탈인은 크로마뇽인이란 낯선 존재를 만나 생존경쟁에서 패배했다. 오랜 세월 사냥감을 놓고 영역 다툼을 벌인 결과 네안데르탈인은 점점 궁지에 몰렸다.

후기 네안데르탈인과 초기 크로마뇽인의 석기는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무기의 성능에 미세한 차이가 있었다. 두 인류는 활은 없었지만 창은 사용했다. 크로마뇽인은 작고 날렵한 창을 힘껏 던져서 멀리 있는 동물을 잡을 수 있었다. 반면, 네안데르탈인은 투박한 창을 들고 사냥감과 맞서거나 등에 올라타서 격투를 벌여야 했다.

덩치 크고 효율성 떨어지는 무기는 네안데르탈인이 패배한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이라크의 스커드 미사일로 미국의 토마호크 미사일을 대적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네안데르탈인이 육식 위주였다는 점도 멸종을 앞당긴 요인일 것이다. 굶어 죽을 지경인데도 고기만 찾았다면 아무래도 살아남기 어렵지 않았을까?

가장 큰 요인은 문화와 소통 능력의 차이였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최초의 것>을 쓴 후베르트 필저는 “소통하고 협력하는 능력이 생존 비결”이라고 말한다. 호모 사피엔스는 언어, 음악, 미술, 의복의 발전을 통해 튼튼한 정체성과 넓은 사회관계망을 이뤘기 때문에 살아남아 우리의 조상이 됐다. 네안데르탈인은 크로마뇽인과 접촉하면서 뒤늦게 옷, 장신구 등 문화를 발전시켰지만 쇠락의 길을 되돌릴 수 없었다.

참고 ☞ EBS <인류, 20만년의 여정> 4편, ‘유럽’
http://youtu.be/UdoIHHieLCM

네안데르탈의 음악성이 호모 사피엔스보다 뛰어났을 거라는 스티븐 미슨의 가설은 퍽 흥미롭다. 네안데르탈인은 언어를 발달시키지 못했는데, 이는 언어와 음악이 분화하지 않은 소리로 소통했다는 뜻이다. ‘흐으음’(Hmmmm : Holistic, manipulative, multimodal, musical, mimetic의 약어)으로 요약되는 그들의 언어는 멜로디와 리듬 등 음악적 요소를 갖고 있었다. (스티븐 미슨 <노래하는 네안데르탈인>, 김명주 옮김, 뿌리와이파리, 제15장 ‘사랑에 빠진 네안데르탈인 - Hmmmm 의사소통’)

▲ 스티븐 미슨의 <노래하는 네안데르탈인>
이들의 음악-언어는 “감정, 의도, 정보를 전달하여 협력을 이루는 수단”으로, 집단의 생존에 필수 요소였다. “사냥할 때, 짝을 찾을 때, 구성원들이 유대를 강화할 때 음악-언어는 훌륭한 소통 수단이었다. 예나제나 거의 모든 집단 활동은 음악을 통해 이뤄졌다.” 네안데르탈인들은 크로마뇽인들처럼 악기를 발명하지는 못했지만, 목소리만으로 무척 정교하게 소통했을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오페라의 레시타티보처럼 대화했다니, 네안데르탈인은 무척 운치있고 재미있게 살았을 것 같다. 모차르트 <마술피리> 중 말 못 하는 파파게노의 노래 ‘흠, 흠, 흠…’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 http://youtu.be/Zo1rjapa0ic

언어가 음악이고 음악이 언어였다면, 그들은 호모 사피엔스를 능가하는 친절하고 상냥한 감성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소설 <마지막 네안데르탈인 아오>에서 소년 아오가 크로마뇽 여성 아키 나아의 곤경을 이해하고 기꺼이 도와주는 것은 충분히 개연성 있는 설정이다. 네안데르탈인의 음악-언어와 비슷한 대화는 요즘 사람들의 실제 생활에서도 볼 수 있다. 맘 잘 통하는 서양 부부들은 ‘으흠?’ 하면 ‘흐음!’ 대답하는 걸로 충분하지 않은가.

두 인류가 만나서 교배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DNA 분석을 했지만 직접적인 교배의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증거의 부재가 부재의 증거는 아니다.” 몬트리얼 대학의 다미안 라부다는 “두 인류는 중동에서 만났을 가능성이 높다”며, “현대인의 유전자 형질의 1%~4%는 네안데르탈인에서 왔다”고 주장했다. 네안데르탈인은 머리칼이 붉었다. 라부다에 따르면 “붉은 머리카락 유전자는 네안데르탈인에게서 온 것”이다. <빨강머리 앤>은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를 물려받았을 개연성이 높다.

▲ 영화 <마지막 네안데르탈인 아오>에서 아오는 크로마뇽 여성 아키 나아와 신뢰하는 사이가 되고, 결국 아기를 낳는다. 두 인류가 살아남아서 지금까지 공존했다면 어떤 세상이 됐을까? 흥미로운 상상을 자극하는 물음이다.
<진보의 함정>을 쓴 로널드 라이트는 현대인의 핏줄 속에 네안데르탈인의 피가 조금은 흐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네안데르탈인의 멸종은 인류사 최초의 대량학살일지도 모른다”고 우울하게 의문을 제기한다. “폭력을 통한 방법을 제외하면 한 인간 집단이 다른 인간 집단을 대체하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며, 두 인류 사이의 긴 투쟁은 결국 대량학살과 다를 바 없다고 지적했다. (로널드 라이트 <진보의 함정>, 김해식 옮김, 이론과 실천, p.48~49)

두 인류가 모두 우리 조상이라고 가정한다면, 그 중 주류가 비주류를 멸종시켰다는 얘기가 된다. 로널드 라이트의 곤혹스런 마음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사유재산, 계급, 국가가 생기기 전에 전쟁이 일어났다는 엄청난 결론으로 우리를 이끈다. 두 인류는 부족 단위로 살았으므로 전면전 같은 게 일어났을 가능성은 없다. 작은 충돌이 이어졌겠지만 이를 일방적인 학살로 규정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다.

네안데르탈인이 우리 호모 사피엔스와 함께 지구촌에 살아남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언어와 문화를 발전시켜 대등한 지구촌의 주인이 되었을까? 호모 사피엔스의 노예로 전락하여 신음하며 생존을 이어갔을까? 거꾸로, 그들이 호모 사피엔스를 지배하게 될 가능성은 없었을까? 두 인류는 농업혁명, 국가의 발생, 전쟁의 일상화를 겪으며 평화와 공존의 지혜를 배울 수 있었을까? 모두 SF의 소재가 될 만한 상상일 뿐, 그들이 영영 멸종해 버린 현실을 되돌릴 수는 없다.

인간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대형 포유류가 지구에서 사라졌다. 그래서 인류학자들은 대형 포유류의 멸종 지점과 시기를 활용하여 우리 조상의 이동 경로를 파악한다. 로널드 라이트의 대학살 가설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네안데르탈인이 크로마뇽인과의 만남 때문에 멸종하게 됐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우리 조상은 대형 포유류 뿐 아니라 사촌인 네안데르탈인까지 절멸시킨 셈이다. 네안데르탈인이 음악-언어를 사용한 상냥한 족속이었다고 상정한다면 무척 마음 아픈 결론이다.

21세기, 지구촌을 가득 메운 우리 호모 사피엔스를 멸종시킬 능력과 가능성이 있는 종족은 누구일까? 외계인이 쳐들어 올 가능성이 극히 희박하다고 볼 때, 우리를 멸종시킬 무서운 종족은 우리 자신일 확률이 거의 100%다. 인류가 곧 멸종할 거라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지속가능한 삶을 위한 지혜를 찾아내고 실천할 주체는 우리 자신뿐이라는 것이다.


▲ 책 <진보의 함정> ⓒ이론과 실천
[참고한 책]
로널드 라이트 <진보의 함정> (김해식 옮김, 이론과 실천, 2006)

2004년 캐나다 CBC 라디오에서 방송한 <사상>(Ideas) 시리즈 중 <진보의 약사> 부분을 정리한 책이다. 로널드 라이트는 고갱의 그림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화두로 인류의 문명을 돌아본다. 우리 문명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커다란 배와 같다. 과거의 어느 배보다 멀리, 빠르게, 많은 짐을 싣고 항해하는 이 배는 우리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배다. 우리 뒤엔 너무나 많은 난파선이 널려 있다. 우리는 실수할 여유가 없을 정도로 엄혹한 현실에 처해 있다.

진보의 낙관적 신화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불의 발견에서 핵무기의 위협까지 인류 문명은 약육강식의 역사였다. 저자는 우리가 생존하려면 진보의 환상에서 깨어나 ‘타자와의 공존’을 모색해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네안데르탈인은 누구였고, 왜 멸종했는가? 그들은 우리의 조상 호모 사피엔스와 가장 비슷한 족속이었지만 엄연한 ‘타자’였다. 저자는 네안데르탈인을 멸종시킨 우리 호모 사피엔스에게 희망이 있는가, 우울한 어조로 묻고 있다.

이 책은 인류의 파국을 노래한 구약의 예언서처럼 읽힌다. 라디오 대본답게 소리 내어 낭독하기 좋다. 거센 파도 속에 마지막 항해를 하며 안간힘을 쓰고 있는 우리는, 관절을 다친 가족을 치료해 준 네안데르탈인처럼 서로 보살피며 미래를 모색해야 한다.

* 글쓴이 이채훈 PD는 MBC에서 <이제는 말할 수 있다>로 방송대상, 통일언론상을 수상했다. 한국PD교육원 전문위원으로 일하며 인문학과 클래식으로 이 시대 PD들과 소통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PD로서 공부하자! 시청자 눈높이에서 질문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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