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비평 MBC-TV 「그대 그리고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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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비평 MBC-TV 「그대 그리고 나]
정서적 밀착에 의한 심리치료 효과 유발
각 인물의 현실성 지속여부가 관건
  • 승인 1998.01.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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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0|「그대 그리고 나」의 핵심적인 의미를 논하려면 주인공인 박상원과 최진실에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드라마 보는 재미를 주는 에피소드들은 다른 조연들로부터 나오지만 결국 그 행태들이 이 두 사람에게 수렴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엄밀하게 말해서 개성있는 조연들의 행태와 성격은 결국 이 두 사람으로 대변되는 현대 한국 가정의 전형성을 묘사하기 위해 배치된 소도구들이다.먼저 박상원. 그는 어촌 어느 가정의 맏아들이다. 흔히 이런 경우 집안의 모든 역량은 맏아들 하나에게 집중 투자된다. 그런 연유로 맏아들은 모범생으로 성장할 수밖에 없고, 집안에서 유일하게 대학을 나오고 기업체에 취직한다. 이제 그가 빚을 갚을 차례다. 이런 ‘맏아들’은 멀게는 「사랑과 야망」으로부터 가까이로는 「젊은이의 양지」나 「형제의 강」에 이르기까지 드라마의 기본 구도로서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이전의 맏아들들, 즉 남성훈이나 이종원이나 김주승이 ‘개천에서 용 난’ 사례로서 작위적이고 극적인 측면이 강조되었던 반면, 박상원은 다만 평범한 화이트칼라 월급쟁이라는 점에서 더 현실적이다. 서울의 삶에 뿌리 내린 한 명의 교두보가 확보되면 그 가족들은 시골에서의 삶을 미련 없이 청산하고 서울로 올라온다. 이미 30년 전에 해체된 시골이라는 공간은 ‘자식 복 없는’ 사람들만 남아 있는 곳이니까. 그 월급쟁이 맏아들은 당연히 결혼을 한다. 누구하고?이제 최진실. 그녀는 이미 한 세대 앞서 서울에 정착한 중산층 집안에서 성장한다. 비록 딸로 태어났지만 자기 능력에 따라 부모의 적절한 뒷받침을 받는다. 여자에게 가해지는 사회의 기본적인 억압이 그녀에게는 무조건 순종해야 하는 절대 조건이기보다는 가급적 피해 가고 싶은, 그러나 그럴 수 없다면 자신의 노력으로 극복하고 소화해내야 하는 하나의 조건일 뿐이다. 행동은 진취적이고 사고는 합리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60년대의 ‘말띠 여자’, 70년대 ‘또순이’, 80년대 ‘까치 며느리’같은 새롭게 포장된 현모양처 이데올로기의 담지자로서의 수퍼우먼으로 묘사되고 있지는 않다. 그녀 또한 현대 한국 중산층 출신의 전형적인 여성이다. 이러한 인물들의 현실적 전형성이 이전의 다른 드라마들과 구분되는 이 드라마의 가장 큰 성취이다.좋은 드라마를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는 게 허락된다면, 첫째 유형은 「모래시계」처럼 시청자로 하여금 거리를 두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다. 둘째 유형은 「그대 그리고 나」를 비롯한 김정수의 드라마들이 그렇듯이 정서적인 밀착을 통해 동일시를 유발하는 것이고, 세 번째 유형은 김운경의 드라마들처럼 해학적인 우화를 통해 삶의 본모습(꼬락서니)을 자각하게 하는 것이다. 「그대 그리고 나」가 몰입에 기반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즉, 문제의 분명한 자각에서 출발한 비판이나 야유 등 사회적인 발언과 같은 외면 효과보다, 차라리 회한과 반성, 현실의 인정과 포용 등과 같은 내적 성숙을 기하는 내면 효과 쪽에 무게중심이 가 있음을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 드라마는 주술사의 심리치료와 같은 측면을 보여준다. 이 드라마에 공감하고 정서적으로 밀착하게 되는 시청자들로 하여금 자기의 고민스런 처지를 대신해서 말해 줌으로써 어떤 카타르시스를 체험하게 해준다는 말이다.그 공통의 처지란 무엇인가? 이를테면 맏아들의 집이기 때문에 밀고 들어오는 봉건적 사고방식의 당당함에 대해 합리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최진실이 갖게 되는 황당함이 그것이다. 또, 가진 재산을 모두 말아먹고 여전히 허풍스런 아버지와 온갖 야비한 방법으로 한탕주의 삶을 추구하는 동생과 바람만 잔뜩 든 여동생, 아버지의 환멸스런 삶의 유산으로 태어난 배다른 동생의 반항기 그리고 그 모든 짐의 무게를 하소연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온 아내 앞에 선 존재로서 박상원이 갖게 되는 외로움 등이 그것이다.하지만 이 인물들의 행태를 잘 들여다보면 그 성격의 미세한 결이 드러난다. 사돈댁에 가서 한바탕 휘젓고 전셋돈을 주고 오는 아버지의 처신, 이본과의 관계에서 보여주는 차인표의 행동, 무례한 시댁식구들을 웬만큼 수용하는 최진실 등의 모습은 모두 자기에게 닥친 문제에 이들이 현명하고 건강하게 대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과격하고 야비한 것은 그들의 겉모습일 뿐이다. 그에 따라 시청자들은 고통스런 현실에 공감하는 한편으로 그것이 참으로 현명하고 건강하게 마무리되어 갈 것임을 예감하게 되고 안도한다. 비록 이 드라마의 겉모습은 시청자들에게 공감이 가는 피곤한 삶으로 점철되어 있지만, 따뜻한 결말에 대한 신뢰감은 일종의 주술적인 치료효과를 낳게 된다.흔히 좋은 작가는 배치된 인물들에 자율성을 부여하고 그들에게 신접(神接)해서 그 개별 논리에 맞춰 이야기를 풀어낸다고 하는데, 이러한 일종의 자동기술(自動記述)은 대단히 치열한 작가 정신에서만 가능하다. 이 드라마는 방금 파악한 것처럼 인물들에 대한 미묘한 성격 부여를 통해 현실감과 시청자의 원망을 담은 가공성을 동시에 성취해 낸다. 그 원망의 방향 곧, 드라마의 방향타는 기본적으로 보수적이다. 뿔뿔이 흩어져 반목하고 서로에게 고통을 주던 가족이 결국 마음으로 한 자리에 모이게 되리라는 점에서 그렇다.지금이 어느 때인가. 그 혹독한 imf시대 아닌가. 이 시대를 감당하고 있는 사람들 각자는 바로 내일 자신의 처지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런 만큼 불안감은 더 크다. 차라리 확 잘리고 나면 이토록 불안하지는 않으련만. 이렇게 불안한 시기에 사람들의 정서는 보수화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지금의 보수적 정서는 분명 과거와 다르다. 여기에는 반성적인 분위기가 짙게 깔려 있다. 도대체 이 삶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 무엇이 잘못됐나.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이런 점을 생각할 때 다만 현재를 향유하는데 몰입한 「질투」이후 「애인」에 이르는 일련의 드라마들을 거품 시대의 드라마들이라고 한다면 「그대 그리고 나」는 반성적인 시대의 첫 번째 드라마라 부를 수 있겠다.지금 이 드라마는 손쉬운 타협으로 가고자 하는 유혹을 강하게 받을 만한 한계선에 직면해 있다. 가령 최진실을 다시금 슈퍼우먼의 구태로 되돌린다거나, 저마다 갈등 요소를 갖고 있는 인물들이 돌연 개과천선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최진실의 임신은 그래서 주목된다. 현실성을 잃지 않으면서 따뜻한 위로를 주는 길과 손쉬운 타협의 길, 언뜻 보면 비슷한 것 같지만 전혀 다른 갈림길이 이 지점이다.pd연합회 방송비평모임 대표집필:손병우|contsmark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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